프레임은 심리학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을 의미한다. ‘프레임’의 저자인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어떤 프레임이 활성화되면 그 프레임은 특정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킨다”고 말한다. 따라서 세상을 어떤 프레임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얻어내는 결과물은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이제 방위산업도 비리 프레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할 때가 도래했다. 이에 ‘방산비리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는 기획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방사청 개청 이후 권력형 비리 한 건도 없어...대부분 실무자급 생계형 비리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들어섰고, 그 해 12월부터 전직 국방부장관 및 국군품질관리소장 등이 군납비리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사태가 일어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범정부 차원에서 국방획득제도 개선을 지시했고, 그 결과 탄생한 조직이 2006년 1월 1일 국방부의 ‘외청’ 조직으로 신설된 방위사업청(이하 방사청)이다.
신설 조직을 국방부 내부 조직이 아닌 ‘외청’으로 선택한 이유는 사업관리의 자율성 확보로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서였다. 자율성 확보란 장관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독립성을 유지해 비리를 차단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방사청 개청 이전에는 국방부장관 등 고위직이 관련된 권력형 비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사청 개청 이후 권력형 비리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실무자들이 퇴직 후 취업이나 생계 수단으로 저지른 소소한 비리가 주를 이뤘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방사청 직원 및 퇴직자의 비리 사건 중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26건)를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비리는 사업 및 계약 부서에서 발생했고 모두 남성으로서 현역 군인은 영관급(특히 중령급), 일반직은 사무관급이 가장 많았다.
이와 관련, 한국투명성기구는 2015년 방사청 직원을 대상으로 청렴도 저해요인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현역 군인의 경우 인사권이 소속 군에 있어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기 어렵고, 기수 문화와 군 상호간 배타적인 관행 타파가 필요하며, 공무원보다 빠른 퇴직 구조가 방산비리 원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 방산비리 재판과정에서도 실형을 받은 피의자들은 대부분 전역을 앞둔 중령과 사무관들이었다. 다수의 군 고위직 인사들도 구속 기소됐지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했음이 밝혀졌다. 이와 관련, 한민구 전 국방부장관은 국회 답변에서 “대다수 방산비리는 생계형 비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정치권과 언론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언론의 무분별한 왜곡·과장 보도 한몫...방산업체의 언론 홍보기능 강화돼야
방산비리 프레임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언론의 무분별한 왜곡·과장 보도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당시 방사청이 잘못된 보도가 나와도 해명하거나 입장자료조차 내지 않은 것 또한 문제였다. 이로 인해 국제투명성기구가 2016년 국가별 청렴도 순위를 발표했는데, 총 176개국 중 한국은 52위로 전년(2015년 37위)에 비해 15단계나 하락했다. 전 세계에서 자국 방위산업에 관해 한국처럼 비리를 부풀려 언론이 보도하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KAI 부사장과 LIG넥스원 연구원이 자살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들의 혐의는 후에 모두 무죄로 밝혀졌지만 당시 방산업체의 적극적인 언론 대응은 없었다. 국방부와 방사청 등 ‘갑’의 심기를 건드리면 더 큰 후폭풍이 몰아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업체들은 이슈가 발생하면 ‘갑’의 눈치를 살피면서 입장을 호소하고 적절한 보상이나 조치를 기대한다. 그러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안으로 선택하는 것이 법적 소송이다.
언론을 통해 이슈를 풀어볼 수도 있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니 업체들은 자제하면서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이면에는 정부가 고객이어서 국민을 상대로 홍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비리 프레임을 바꾸려면 이제라도 방산업계가 이미지 홍보에 신경 써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방산업계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자신을 변론하지 않으면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해주지 않는다.한 언론계 인사는 “업체들이 언론 홍보기능에 관심 갖지 않으면 잘못된 비리 프레임의 피해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와 관련, 국방대 최기일 교수는 “방산업체 홍보 예산의 일정 부분을 원가에 반영시켜주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방사청 근무자, 전문성과 책임성에 심각한 문제 있으나 별다른 대책 없어
방사청에 근무하는 공무원과 군인들의 전문성 부족도 비리 프레임 형성에 일조해 왔다. 이들은 투명성 등의 이유로 한 자리에 2∼3년 근무하고 타 직위로 순환 보직된다. 따라서 최소 5년에서 10년 이상 진행되는 방위사업을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제대로 경험하기 힘들다. 게다가 개청 당시보다 사업수가 2배나 증가했음에도 인원은 오히려 줄었다. 실무자가 담당하는 사업이 많으니 사업관리가 부실해질 수밖에 없고 비리로 오해 받는 상황도 만들어진다.
더욱이 청장과 차장이 대부분 낙하산으로 임명되고, 본부장·국장·부장 등도 사업관리를 실무자부터 경험한 사람이 드물어 팀장과 담당 실무자가 처한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런 상황에 방산 분야를 잘 모르는 감시·감독 인원만 대폭 늘어나 수시로 담당자를 불러 문제를 확인하고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는 분위기다.
또한 사업 진행 간 단계마다 정책적 판단이 필요함에도 고위직 공무원들은 관련 부서와 협조해 해결하기보다는 책임을 피하면서 사업을 지연시키고 있다. 정책적 판단조차 방산비리 수사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서의 실무자가 감사나 수사를 받아도 도움은커녕 방관하는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 결국 업무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지만 대책은 별무한 상황이다.
오랫동안 방산 분야를 연구해온 한 전문가는 “현행 방위사업법은 공무원이 사업을 관리하면 비리로 오해 받는 구조를 피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면서 “융통성이 필요한 사업관리는 전문조직에서 따로 하고, 공무원은 예산 배정과 계약 체결 등 명확한 업무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미국처럼 전문교육을 통해 소양을 갖추고 관련 업무를 계속했어야 사업관리가 가능한데 우리는 그런 체계가 구비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방산업체 임원으로 근무하는 군 출신 전문가는 “방사청의 정책기능은 모두 국방부로 이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국방부가 획득정책의 대표로 한 목소리를 내고 이슈가 발생하면 앞장서 해결하면서 책임지는 구조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는 대표도 없고 서로 미루다가 이견이 발생하면 소송으로 해결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문제와 부족함 솔직히 털어놓고 필요한 것 협력해야 회생할 수 있어
현 정부에서 임명된 전재국 전 방사청장은 금년 1월 방위산업학회가 주최한 조찬강연에서 “방위사업의 미래를 위해 이제는 투명성을 넘어 효율성과 전문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지난 8월 정부가 왕정홍 전 감사원 사무총장을 후임 방사청장에 임명하면서 또 다시 투명성이 제일 먼저 강조되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 심상렬 광운대 방위사업연구소장은 “투명성은 효율성과 상충되기 때문에 지나치게 강조하면 효율성이 저해됨으로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역임했던 김태유 서울대 교수는 “규제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전문가로 바꿔야 한다”면서 “부처가 아닌 직무에 소속시켜 어느 자리에 가도 자기 전문 분야를 담당하게 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방산비리 수사의 여파로 잘못 형성된 방위사업 구조를 개선하지 못하면 국내 방위산업은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 많다. 이미 방위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방위산업진흥회의 2017년 방산업체 경영분석 자료에 의하면, 통계를 작성한 1983년 이래 처음으로 전체 매출액이 전년에 비해 감소했고 2002년부터 시작된 흑자구조도 2017년 적자로 전환됐다.
국가안보를 위해 정부가 돈을 들여서라도 육성해야 하는 것이 방위산업이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국방부와 방사청, 연구소, 업체들이 서로의 문제와 부족함을 솔직히 털어놓고 정말 필요한 것에 협력하며 다가가야 회생할 수 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올해 3월부터 국회 국방위원장이 주관해온 ‘방위산업 발전을 위한 민·관 상생협력 간담회’가 새삼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