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좌측 한미 장병들이 양양에서 “한국군 3사단이 38선을 돌파한다”라는 표지판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과 우측 전쟁기념관에 보관된 이승만대통령의 친필 ‘북진명령’ [사진제공=국방부]
15일 북한 평양에서 '남북 대결'로 펼쳐진 월드컵 예선전 0:0 무승부의 의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지난 15일 북한 평양에서 '남북 대결'로 펼쳐진 월드컵 예선이 무승부로 끝났다.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는 이 결과를 "남북 모두를 살린 최선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날 북한의 치밀하고 계획적인 수령 우상화 작업을 언급하면서 "13일은 북한의 체육절이다. 만약 축구에서 졌더라면 최고 존엄(김정은 국무위원장) 얼굴에 똥칠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무승부 경기로) 김정은도 살고, 북한 축구 관계자들을 살렸고, 북한 선수들을 살렸고, 우리 팀(한국 대표단)도 살렸다"며 "만약 한국이 이겼다면 손흥민 선수 다리가 하나 부러졌든지 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1950년 10월 1일은 북한 수령이 얼굴에 똥칠 정도의 수모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도망가기 바빴던 하루였다.
38선 돌파 관련 이승만대통령의 분노가 폭발한 ‘북진명령’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 ‘전쟁과 휴전’을 보면 …
서울이 완전 탈환된 이틀 후인 9월30일 오후 부산 경무대에서 호출명령이 떨어져 정일권 육군총장을 비롯한 육본 참모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대구 동촌 비행장을 출발했다.
경무대에 도착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정 총장, 간밤에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들었는데, 38선에 도달한 부대는 어느 부대입니까?”라고 일성을 내뱉었다.
정총장은 이종찬 준장의 제3사단과 송효찬 준장의 수도사단이라고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사단 이름이 아니라 연대 이름이 무엇이냐?” 고 다시 물었다.
김종순 대령의 제23연대와 임충식 대령의 제18연대라고 설명하자 이 대통령은 이들 부대를 특별히 표창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그런데… 정 총장…”하며 이 대통령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정 총장은 어느 쪽인가, 미군 쪽인가?”
이 대통령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은 한참 후였다. 이 대통령은 각 참모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다음 질문에 앞서 다짐을 받으려는 것 이였다.
“정 총장, 그리고 여러분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입니다” 우리 모두는 눈을 감았다. 이 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 총장, 그리고 여러분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입니다” 우리 모두는 눈을 감았다. 이 대통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여러분, 38선에 도달한 우리 국군에게 어찌해서 북진하라는 명령을 하지 않소? 38선 때문인가, 아니면 딴 이유 때문인가?” 꾸중이었다. 실내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정총장은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38선 때문입니다” 이어 워커 중장과의 이야기를 간추려서 보고했다(워커 중장은 “미 제8군의 38선 돌파는 1950년 10월15일~30일 사이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맥아더의 복안이라고 정총장에게 귀띔했다). 이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38선이 어찌 됐다는 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 이때처럼 이 대통령이 노여워하는 것을 본 적은 그전에도 그후에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에 실내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한참 후에 이 대통령은 인사국장 황헌친 대령에게 물었다.“인사국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8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에 실내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한참 후에 이 대통령은 인사국장 황헌친 대령에게 물었다.“인사국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8선을 넘어도 되는 것인가, 안 되는 것인가?”
황대령은 머뭇거림없이 대답했다. “각하의 명령이라면 국군은 언제라도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어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에게도 차례로 물었다. 모두 황대령과 같은 대답을 했다. 특히 강대령은 유엔이 북괴군을 침략자로 낙인을 찍은 이상 도망치는 침략자를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헌병사령관 최경록 대령은 38선은 이미 북괴군이 남침하면서 없어졌으므로 우리 국군만이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흡족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군수국장 양국진 대령만은 조금 달랐다. “각하 좀더 신중히 검토한 다음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그건 무슨 뜻인가?”라며 잠시 표정을 굳혔다.
그런데 군수국장 양국진 대령만은 조금 달랐다. “각하 좀더 신중히 검토한 다음에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은 “그건 무슨 뜻인가?”라며 잠시 표정을 굳혔다.
이 대통령은 끝으로 정일권 총장의 결심을 물었다.
“저희들은 대한민국 국군입니다. 유엔군과의 지휘권 문제가 있습니다만, 각하의 명령에 따라야 할 사명과 각오를 갖고 있습니다. 38선 돌파는 이제 시간 문제입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제가 현지에 가서 책임지고 결정하겠습니다.”
이 대통영은 잠시 후 결론을 내렸다. “여러분의 의견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습네다. 나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우리 국군 지휘권을 맡기기는 했으나, 내가 자진해서 한 것입네다. 따라서 되찾아 올 때도 내 뜻대로 할 것이오. 지휘권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질 일 없습네다. 그러한 즉 대한민국 국군인 여러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명령만 충실히 지켜 주면 되는 것이오.”
이 대통령은 이어 책상으로 걸어갔다.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이것이 나의 결심이고, 나의 명령이오” 이 대통령은 그 종이를 정총장에게 주었다.
‘명령,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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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에서 반격작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수복(收復)하고 38도선으로 접근하자, 이 선의 돌파 여부가 초미(焦眉)의 관심을 끈 정책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유엔군 계통으로 38도선 돌파 명령이 내려지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 돌파결심이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한국군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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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에서 반격작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수복(收復)하고 38도선으로 접근하자, 이 선의 돌파 여부가 초미(焦眉)의 관심을 끈 정책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유엔군 계통으로 38도선 돌파 명령이 내려지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은 38도선 돌파결심이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한국군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참모총장 이하 육본 참모들과의 사이에 벌어진 논의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6·25가 발발한 그해, 이 대통령은 75세, 장군들은 30세 안팎이라 경륜 많은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들과의 대화처럼 느껴졌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원수 70세, 美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중장 60세였다. 둘 모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 후 美 육군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지만, 조지 워싱턴 대학 학사, 하바드 대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인 이승만 대통령이 그들에게 밀릴 것은 전혀 없었다.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이승만은 조선조 말기에 민족주의 운동을 하다가 무기징역수로 복역하면서 《영한사전》을 저술했고, 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40년 여 간은 망명생활을 했던 독립투사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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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이 된 3사단의 강원도 양양 38선 돌파일
경무대를 나온 후 정일권 총장은 부산에서 강릉으로 직행했다. 당시 강릉에는 제1군단사령부가 있었다. 제1군단 예하의 2개 연대가 이미 38선까지 북상해 있었음은 앞에서 썼다. 제1군단장은, 정 총장과 만주 봉천군관학교 재학 중에 1~2위를 다투던 동기생인 김백일 준장이었다. 김백일 장군에게 정 총장이 물었다.
“무슨 묘안이 없을까?” 김백일 준장은 갑자기 “있다. 있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5만분의 1 사이즈의 작전지도를 펴 놓았다.
“바로 여기야!”라면서 한 지점을 짚었다. 양양군 ‘기사문리’라고 적힌 38선 바로 북쪽의 조그마한 항구였다. “여길 보라구. 38선에서 약 800m야. 여기서 적의 직사포탄이 심심찮게 날아와. 이곳을 이용하자고….”
당시 인민군은 기사문리의 적진에서 국군 23연대를 향해 맹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김 군단장의 논리는 이러했다. ‘아군의 희생이 적지 않는데, 총 한발 못 쏘고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 38선 때문이다. 앉아서 당할 수 없다. 잠깐 38선을 넘을 수밖에 없다. 미 8군은 이걸 이해해 달라.’
정 총장은 이런 논리로 워커 중장을 설득해 동의를 얻었다. 그리곤 38선에서 대기 중인 제23연대에게 “즉각 북진하라”고 명했다. 10월1일 오전 11시25분이었다. 그 후, 국군의 돌격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실은 미군 측도 돌파를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엔군도 일주일 늦게 북한에 진격 개시
10월1일,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에 항복을 권고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다음날인 10월2일, 유엔군은 “10월3일 0시 이후 38선의 돌파를 명한다”고 하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했다. 10월6일, 국군 제2군단은 38선을 돌파, 북진을 개시했다.
10월1일,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에 항복을 권고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다음날인 10월2일, 유엔군은 “10월3일 0시 이후 38선의 돌파를 명한다”고 하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했다. 10월6일, 국군 제2군단은 38선을 돌파, 북진을 개시했다.
유엔 안보리는 38선 돌파 제안이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봉쇄되자, 미국은 이를 총회에 제의했다. 총회는 논쟁 끝에 10월7일 38선 돌파를 의결했다. 이것에 의해 10일 아침, 맥아더 원수는 제8군에 북진을 명했다. 이에 앞서 맥아더는 북한 진공의 기본구상을 결정하고 있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제8군으로 서울 북방 지역에서 38선을 돌파, 평양을 향해 진공한다. 2. 제10군단은 인천과 부산에서 승선한 후 원산에 상륙, 미 해병제1사단은 중국과의 국경으로 북진케 하고, 미 제7사단은 평양 북쪽을 향해 서진케 한다.”
70년전 ‘38선 돌파’를 통해 알수 있는 ‘대미외교전의 교훈’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23연대 3대대 10중대가 강원도 양양에서 38선을 돌파했다.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38선 이북 지역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해도 된다는 명령이 내려가기 일주일전의 상황이었고 이는 외교전의 대가인 이승만 대통령만이 가능했다.
한국군의 38선 돌파는 보름 전인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군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기념해 1956년 9월 4일 대통령령 제1117호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고, 3사단에는 38선 돌파 기념비를 세웠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황이 역전되고 38선 이북으로 진격해 압록강에 도달했던 사실은 한국군에 하나의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38선 돌파가 미국에는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기억과 평가로 남아 있다. 미국의 합동참모본부에서 공간한 『한국전쟁』(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번역)에 따르면 “38선 돌파는 하나의 ‘재앙’을 불러온 사건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엔의 모호한 결정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38선 돌파가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미국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는 것이다. 중국군 참전으로 인한 미군과 유엔군의 인적 손실, 그리고 중국과의 결전으로 인해 냉전과정에서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는 것이다.
38선 돌파는 맥아더 개인에게도 재앙이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중국군이 참전한 이후 행정부의 극동정책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중국 본토에 대한 공중 공격 및 해상봉쇄를 포함한 군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이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으며 “더 이상 그의 불복종을 참을 수 없었다”면서 그를 해임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개입’을 한 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유엔의 깃발 아래서 싸웠던 한국과 미국 사이의 이러한 상반된 기억과 평가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역사를 뒤돌아보게 한다. 작금의 복잡하고 답답한 남북미 관계를 살펴볼 때, 우리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정확히 분석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다. 현 정부와 국민들은 너무 우리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아닐지 되씹어 보게 한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