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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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 [사진제공=김희철]
낙오된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 북한군 1개 사단 공격 지연시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발발한 6.25남침전쟁시 북한의 인민군은 국군에 비해 2배인 198,380명의 병력과 전차여단 등 3배인 화력/장비의 우세로 기습 남침공격을 했다.

북한은 6.25전쟁 후 ‘조국해방 전쟁사’에 전후 상황경과를 분석하여 ‘3단계 5차 작전기’로 구분하여 기술했다.

1단계는 개전-선 공격, 2단계는 한/만 국경선으로 패퇴, 3단계는 중공군의 침략과 전선의 고착화이다. 특히 1단계를 충북지역전사의 요도 ‘북한군의 작전단계’와 같이 5차에 걸친 작전기로 세분화하여 분석하였다.

‘조국해방 전쟁사’에 제시된 북한 인민군의 1단계 ‘선 공격’ 중 ‘제2작전기(6.29~7.6)’가 바로 공격기세를 계속 유지하여 한국군의 방어 템포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종 승리의 관건인 단계였다.

그런데 피아 혼란한 상황에서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 원 소속부대에서 연락 두절로 낙오되었으나 해당 지휘관이 끝까지 부대를 인솔하여 아군 작전에 크게 기여한 사례가 있었다.

비록 원소속부대가 아닌 타부대였지만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장의 임기응변(臨機應變)식 ‘임무형지휘’ 결과로 인접 사단의 지휘 및 작전 공백을 해소시켰다. 즉 북한 인민군의 공격 템포를 24시간 끊어버리고 아군 방어 준비시간을 확보하여 한국군 전체 작전에 기여한 것이다.

블확실성의 연속인 전장 상황에서 임무형지휘가 중요

불확실한 전장, 예상과 다른 상황 전개 대처가 변수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대, 인제군 기린면의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는 주력과 멀리 떨어진 방동리에 있어 철수 명령도 못 받아 뒤늦은 6월 27일이 되어야 철수를 시작하여 적중을 탈출했다.

북한군 편의대와 교전도 하면서도 굶주린 상태로 산악지대를 이용 행군을 강행하여 7월 4일 아침에 제천에 도착했다. 다시 철수를 계속하다가 제천 4km남쪽 산곡동에서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충분한 급식과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다음날인 5일, 단양에 도달했을때 중대 병력은 타부대 낙오병을 합쳐 200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중대가 단양까지 왔는데도 아군을 만날 수 없었고 도로와 철로상에 가설된 교량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이미 국군 8사단 후발대가 단양을 떠났고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와 일부 주민들은 철수 또는 피난한 다음이었다.

8사단, 제천-단양 방어중 작전명령 착오로 전장이탈

한편, 동해 강릉에서 방어하다가 대관령으로 철수한 8사단은 6월 27일 강릉을 목표로 반격을 감행하던 중 육본의 작전명령에 따라 공격을 중단하고 진부-평창을 거쳐 7월2일 제천에 도착했다.

육본 명령은 6사단이 장호원-청부-보은 축선, 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받은 8사단은 6사단 7연대로부터 제천지역을 인수받고 제천 방어와 원주 탈환 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7월4일 탈환작전을 위해 원주에 이르는 가리파고개에 배치되어 있던 8사단 10연대가 인민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방어에 실패해 분산 철수하여 적과 접촉이 단절되었다.

때마침 육본에서 6사단장을 거쳐 전달된 육본 작전명령에는 “충주로 이동하라”고 했다가 다시 전문으로 “8사단은 즉각 대구로 이동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8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중요한 요충지인 제천을 아무런 이유 없이 포기하라는 육본 명령이 의심스러웠지만 관계 참모의 확실하다는 확인보고를 받은 뒤에 이동 명령을 하달했다.

7월 5일 새벽 2시, 제천에서 부대원들을 열차에 탑승시켜 대구로 출발시키고 사단장은 짚차로 충주를 거쳐 대전 육본에 도착하여 작전명령 확인 결과, 육본에서는 8사단을 대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없음을 알았다.

곧바로 대전역으로 이동 철도비상전화로 이동 상황을 확인 결과, 이미 이동부대는 대구, 영천까지 도달하여 사단 참모장에게 되돌아갈 준비 명령을 하달하고 L-5연락기편으로 대구로 이동, 주력과 합류했다.

바로 이 싯점에 6사단 2연대에서 낙오되어 본대를 찾을 수 없었던 9중대장 정대원 중위(육사8기)는 국군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단약역으로 달려가 철도비상전화로 8사단 군수참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용병(用兵)에는 속임수를 써야한다”는 뜻의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 사례

상급부대와 통신이 단절됐지만 지휘관의 창의적 판단력으로 전투 승리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에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는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뜻으로 손자가 가장 우선해서 강조한 병법이다.

8사단은 한시라도 빨리 제천이나 단양으로 진출하려고 서둘렀으나 이 날 오후 피난민을 만재한 과중한 중량의 열차가 죽령터널에서 고장을 일으켜 선로가 막혔기 때문에 더이상 진출이 지연되고 있었다.

이때 낙오된 1개중대가 단양에 남아있다는 상황은 새로운 변수가 됐다. 8사단으로는 북한 인민군이 선점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양을 방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게 하였다.

때마침 북한 인민군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홍천-원주-제천 축선을 따라 남하하던 인민군 7사단은 전투력이 쇠진하여 7월5일 제 12사단으로 개칭하고 진격방향을 바꾸어 충주로 투입하고 제천지구를 인민군 8사단에 인계하였다.

중앙선 축선으로 남진하라는 임무를 받은 인민군 8사단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인지 임무수행에 다소 미흡했다. 12사단과 임무교대 하였으나 국군의 방어선이 어딘지 알 수 없어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인민군 8사단은 편의대를 피난민 사이에 침투시킨 결과 제천 -단양 사이에는 국군이 전혀 배치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급히 일부 병력을 단양으로 진출 시켰다.

그러나 단양에는 낙오된 6사단 9중대의 병력들이 이미 단양철교 좌우측에 배치되어 있고 증강된 수색 분대가 남한강 북쪽 연안에서 활동하고 있자, 국군의 규모를 예측할 수 없는 인민군들은 섣불리 단양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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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 6사단 2연대 9중대가 급편 방어하여 북한군 8사단 공격을 24시간 지연시킨 단양철교와 전쟁기념관 조형물 모습 [사진출처=동영상 캡처/김희철]

인민군의 눈을 속이고 대규모 병력이 방어 전선을 구축하고 있음으로 오판하게 만든 낙오된 9중대는 자신들이 한국군 전체 작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모른 채 남한강을 넘어올 적들을 막아내려는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골든타임의 밤을 견디어 냈다.

다음날 9중대는 단양으로 진출한 8사단 21연대와 임무 교대 후, 안동-대구-괴산-충주를 거쳐 7월 10일 수안보에서 6사단 2연대 본대와 합류했다.
그 후 8사단은 인민군 8사단의 지휘소 습격 등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적의 전투력을 탕진시키며 단양-죽령 지역에서 7월 12일까지 적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비록 초전부터 낙오된 2연대 9중대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고립된 상황에서 건제를 잃지않고 탈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또한 북한 인민군이 무혈 입성할 뻔 했던 단양을 기만 작전으로 확보함으로써 8사단의 중앙선 축선 지연작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는 손자병법 제1 시계(始計)편의 “용병(用兵)에는 꾀와 속임수를 써서 아군의 의도를 속여 적들이 대처 못하도록 한다”는 ‘병자 궤도야(兵者 詭道也)’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상급부대와 지휘 및 통신이 단절된 상황에서도 해당 지휘관의 자율적, 창의적 판단과 독단적 결정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공적인 임무형지휘의 모범이 되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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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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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9) 낙오된 1개 중대가 인민군 1개 사단을 늪에 빠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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