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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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가 1950년10월26일 14시즈음 압록강 초산진에서 수통에 물을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전달 [사진제공=국방부]

이승만, 평양탈환 축하 기념식 참석... 통일의 감격에 젖어 수통의 압록강 물을 마셔

그 시간에 국군 6사단은 거의 괴멸되는 위기를 맞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이승만대통령은 1950년 10월 27일 김일성광장에서 평양탈환 축하 기념식과 국군-유엔군환영시민대회에 참석했다. 그 시각 초산의 압록강변에 선두로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부하에게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냈다.

하지만 이승만대통령이 통일의 감격에 젖어 수통의 압록강 물을 마시는 그 시간에 국군 6사단은 산길을 이용해 침투식으로 공격을 하여 후방을 차단한 중공군들에게 거의 괴멸되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동락리 전투의 영웅들인 6사단 7연대가 가장 먼저 압록강에 도달

패전한 북한군 사단은 태영호 공사 부인의 할아버지인 오백룡이 지휘

이대용 대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국경에서 오랑캐 막아내다 죽을테니…”

[김희철의 전쟁사](2) “구월산 여장군 이정숙과 '동락리 전투'의 김재옥”편에 소개했던 동락리 전투는 6·25 남침전쟁 초기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국군에게 희망을 심어준 첫 번째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6·25 남침전쟁 발발 12일째인 7월7일 동락리 전투에서 국군 제 6사단 7연대는 ▲적 사살 2,186명 ▲포로 132명 ▲화포 및 총기 2,012정 ▲장갑차 및 차량 88대 ▲말 24필과 상당량의 탄약 등을 노획하며 전쟁 발발 이후 최초 승리이자 최고의 전과를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비해 국군의 손실은 전사 9명, 부상 53명뿐이었다.

노획장비는 대전에서 국민에게 전시함으로써 국군의 승리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노획품은 소련 제품이라는 표시가 있어, 소련이 6·25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로 유엔에 보내졌다. 승전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제 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주었다.

동락리 전투의 영웅들인 7연대(연대장 임부택 대령)는 6사단의 선두 부대로서 화천을 점령하고 노획했던 북한 트럭 150 대를 밑천으로 쾌속으로 북진 중에 다량의 트럭들을 더 노획해서 300대의 트럭으로 완전 차량화했던 덕분에 어느 부대보다도 빠르게 10월26일 14시 즈음 1착으로 압록강에 도착하였다.

위의 우측지도는 빨랐던 6사단 7연대의 진격 상황을 보여준다. 1950년 10월 말에 각 경쟁 부대의 북진 도달점은 왼쪽 영연방 여단의 정주가 있고 오른쪽 7, 8사단의 덕천이 있다. 한달 뒤인 11월 말에 미군 7사단과 함께 오른쪽 혜산진까지 북상했던 3사단과 충북 도경 전투 경찰 병력이 있었다.
 
1950년 10월 26일 오전, 국군 6사단 7연대 1대대는 압록강을 접하고 있는 초산군의 읍 소재지 6km 지점에서 북한군 여단 병력과 압록강 도달을 앞둔 마지막 북진 전투를 벌였다.

북한군 사단은 계속된 패전으로 축소되어 여단 규모였다. 이 부대 지휘관은 현재 남한으로 망명한 태영호 공사 부인의 할아버지인 오백룡이었다고 한다. 적의 저항은 상당히 거셌으나 곧 한계에 와서 국군에게 길을 열어주고 패주했다. 김용주 중령이 지휘하는 1 대대는 텅텅 빈 초산읍내를 통과해서 압록강으로 치달렸다.

최선봉 1 중대장으로 초산 서북쪽에 난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진격하여 압록강에 선두로 도착했던 故 이대용 장군은 그의 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 에서 “자동차 도로는 큰 반원을 그리며 구부러져 있었다. 이 위를 군용 트럭은 달렸다. 서북쪽으로 커브를 꺾어 조금 나가니 거대한 막이 확 열리는 듯 장엄한 신비의 대호수가 화면처럼 떠올랐다.

산과 산사이를 감색의 물로 가득 채운 장강의 모습이 나타났다. 압록강이었다!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 15 분! 아 ! 이 나라 남아로 태어나서 자유의 종을 울리며 남북을 통일하고 나니 지금 죽어도 무슨 유한이 있으리오! "라고 전했다.

모두들 벅찬 가슴에는 흥분과 감회가 교차했다. 뒤이어 압록강에 도달한 1대대원의 눈에 띈 것은 북한군이 넓은 강을 가로 질러 중국까지 놓은 뗏목 다리와 이 다리를 건너고 있던 많은 북한 주민들이었다.

다수의 인원이 이미 다리를 건너가 중국 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북한 노동당원 간부들과 관리들이 많은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배속된 연대의 57mm 대전차포로 이 다리를 파괴하였다.

북진의 기념비적인 유명한 압록강의 물은 수통에 담아 연대 본부로 보내고 오후 4시경, 김용배 대대장의 명령에 의해서 이대용 대위의 1 중대를 남겨놓고 대대의 다른 중대들은 모두 6km 남방 초산 읍내로 철수했다.

다음 날인 10월 27일,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방문해서 서쪽 벽동 쪽으로 진격했던 2연대가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고전하고 있다고 걱정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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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측, 7연대 1 대대 1 중대장 이대용 대위(예비역 준장, 전 주월남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공사)와 우측, 중공군의 진격로와 이대용 중대의 적진 탈출 요도 [사진제공=국방부]
초산 압록강물 수통에서 맛본 통일 기쁨, 이틀 못넘기고 비극 시작

7연대, 중공군의 후방차단으로 생존자 22명만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 복귀

그날 이대용 대위는 1 소대장 서근석 소위와 연락병 홍인곤 하사, 그리고 1 중대가 북진하면서 순천에서 구출했던 적십자 간호 여고생 두 명 박태숙, 정정훈 여사와 함께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있던 신도장과 중국 쪽을 오갔던 나룻배의 뱃사공이 젓는 배를 타고 압록강을 여기저기 오가며 즐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압록강에서 머무른 시간은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압록강 도착 이틀째인 1950년10 월 28일,오후 다섯 시 이 신도장 나루터에 있던 검문소 성격의 분주소에서 위치한 1 중대 본부로 초산의 대대로 부터 “대군의 중공군이 퇴로를 차단했다는 불길한 정보와 함께 당일로 신속히 전원 철수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이대용 대위는 어이가 없어 대대장에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의 국경선에서 오랑캐를 막아내다 죽을테니 이 곳을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하고 철수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거듭 사정했지만 초산의 1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상황의 엄중함을 설명하며 거듭 빠른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대용 중대는 눈물을 머금고 두 시간 뒤인 저녁 6시 45분 대대 본부가 있던 초산 읍내로 철수했다., 7연대는 다음 날인 10월 29일 7연대는 중공군의 사격과 교랑 파괴를 무릅쓰고 남하하면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빨리 벗어나려 노력했었으나 실패했다.

중공군 13병단 예하의 사단 병력 규모 공격으로 길게 늘어선 7연대는 선두 부대부터 맨 뒤 후위 부대까지 피해를 입어 30일 자정 12시즈음에 연대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병력의 76%가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다.

부하 160명을 데리고 전투에 돌입한 이대용 장군은 살아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바다와 같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었고 철수 전투중에 대부분의 부하들을 잃었다.

이대용 대위는 악전고투 끝에 9일 후인 11월 8일 7연대에서 최초로 단지 생존자 22명만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지역으로 간신히 복귀할 수가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사자성어의 의미처럼 초산 압록강물 수통의 통일 기쁨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지만 생존자들 중에는 기적 같이도 순천에서 북한군에게 끌려 가던 중 국군이 구출해서 데리고 북진했었던 적십자 간호 여고생 두명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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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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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 이승만이 맛본 수통의 압록강물, 통일 기쁨은 비극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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