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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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제2차 공세 상황도와 사령관 펑더화이, [제공=국방부/육사]

 

중공군 제 2차공세시 청천강 전투는 미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긴 어이없는 한방

청천강 전투에서 전력 보존했다면, 현재의 남북군사분계선은 청천강이나 대동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공군 제1차 공세후 재정비를 마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1950년 11월 24일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덕천과 영원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도록 명령을 하달하였다.

11월 8일까지의 중공군 제1차 공세시 비호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후 개천으로 이동했던 국군 7사단과 인접 8사단은 이번 중공군 제2차 공세로 완전히 궤멸되었다.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연대장 1명이 전사하였으며, 전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당시 한국군 2군단장 유재흥장군은 자신의 예하사단인 7사단과 8사단의 궤멸사실을 덕천을 방어하던 6사단이 중공군과 교전하기 전까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한국군 2군단이 붕괴되고 청천강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지자 미 8군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1월 25일에 한국군 6사단이 지키던 덕천이 중공군에게 떨어졌고, 이날부터 미군 선두의 중대, 대대는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서 좌우 협격을 받았고 얼마 후 미 9군단은 잠복한 중공군에 사방으로 포위되어 집중공격을 받았다. 이미 11월 25일에 미 9군단과 한국군 2군단 등의 병력은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미군 및 연합군에 평양까지 후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때 중공군 38사단은 이미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확보에 나섰지만, 11월 26일부터 중공군은 대공세로 밀고 내려와 미군과 한국군은 물론이고 터키여단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날 밤에는 미 25사단이 중공 39군의 침습을 받았으며, 영국군 27여단 역시 인해전술을 펼친 중공군에 의해 삼면으로 포위되어 도륙을 당했다.

11월 27일에도 미 9군단은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혼전에 빠져 분란과 후퇴를 면치 못하였다. 11월 28일에 이르러서야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전황의 급변과 중공 정예부대의 대거침략을 워싱턴에 보고하였고, 새로운 전국의 돌발을 대내외에 성명으로 발표하였다.

11월 28일 당시 미 9군단은 한국군 2군단을 엄호하면서 퇴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중공군의 선두는 삼소리 일대에 침습하여 있었고, 중공군 주력은 덕천-영원선을 탈취하고서 덕천 남쪽 3.2km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한편 터키여단은 전날 와원 7km 동쪽에서 밤을 맞이했는데, 중공군의 박격포와 기관총 등의 중장비 포함 집중 화력에 의한 기습을 받아 많은 터키군 병사가 전사하였거나 실종되었으며 통신차량도 적에게 피탈되었다.

11월 29일 아침부터 유엔군은 청천강 남안으로의 철수작전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공군과 도처에서 격돌한 끝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어쨌든 이날 일몰 무렵에는 대체로 유엔군 주력이 청천강을 건너 양덕-성천-순천-숙천을 연하는 선을 확보하였고 고수진지를 점령하였다.

11월 30일에는 미 9군단 주력이 신안주 비행장에서 철수하였고, 신안주-숙천-평양을 잇는 경의간선에는 미 1군단 주력의 남하 대열이 길을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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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난민들과 순직한 워커 미8군사령관 후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리지웨이 장군[국방부/육사]
중공군 제2차공세시 유엔군의 참패, 이동정보와 병력 규모 오판이 원인
 

유엔군이 중공군을 얕잡아보고 이동정보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었다.

사실 유엔군의 자신감은 제공권의 장악에 근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 6개 군단급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에 포진할 때까지 유엔군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중공군이 대공세를 펼치는 와중에도 중공군 규모를 수 개 사단으로 오판하거나 정규군이 참전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놓고 논란을 거듭하는 등 정보 오판을 수정하는 과정이 너무 느렸다.

이는 중공군이 흰색 설상 위장복으로 유엔군의 항공 정찰에 완벽하게 대비한 데 기인했는데, 실제로 당시 중공군은 미군의 항공 정찰을 방해하기 위해 주로 야간에만 산길을 타고 미군 후방으로 포위하는 침투식 이동을 실시했다. 해가 뜨기 전에 행군을 마치고 주간에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철저한 행군 군기와 숙영 군기로 항공 정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미 5공군 소속 전투기와 폭격기,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전폭기는 청천강 전투 과정에서 지상군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고, 철수 작전에도 아군 피해를 줄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지만, 이들 항공전력이 전투의 승패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 이유로 복잡한 한국의 산악지형은 단순히 화력으로 커버하기에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산악지형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적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체계가 있어야 하지만, 6.25 전쟁 당시 유엔군의 감시체계는 그 정도 수준이 되지 못했다. 앞으로 유사시에도 현 군인들은 이것을 참고해야한다.

패배의 원인으로 미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로비 육군소장의 무능과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월튼 워커 중장의 책임을 거론하는 견해도 있다. 6.25 전쟁에 대한 미 육군의 공식 전쟁사 중의 하나인 ‘한국전쟁의 서부 전선’(원제 Disaster in Korea)에서도 워커 장군의 평양 방어전 포기 등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11월 25일 중공군 2차 공세로 위기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나, 평양이나 그 주변에서 병력을 수습해 유엔군이 방어전을 펼칠 여지는 있었음에도 너무도 쉽게 평양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미 8군과 10군단의 지휘가 분리되고 양 부대가 단일 전선을 형성하지 않은 점 등이 청천강 비극의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혹은 워싱턴의 지휘부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대표로 하는 극동군사령부의 불화를 실패의 원인으로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맥아더 원수의 명성과 경력에 눌려 상급부서에서 위기 회피에 필요한 적절한 통제를 하지 못했고 그것이 참화로 연결됐다는 해석이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는 저서에서는 미묘한 증언도 나오고 있다.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되기 전에 미군 안팎에서 “지금 상황에서 공세를 재개하다가는 위기를 맞을 것”이란 경고가 여러 경로로 나왔음을 보여주는 증언이 대표적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미군의 주력인 8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 미군 2사단의 병력 손실은 8천 명에 달했고, 사단 자체가 붕괴해버렸다. 처참한 피해와 졸전(?)으로 미군 수뇌부는 미2사단의 해체(!) 방안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이 정도의 참패는 미국이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때의 승리로 기세를 올린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에서 미 해병1사단을 포위공격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미 해병대는 대부분의 물자를 버리고 몸만 빼내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중공군이 노획한 미군의 무기 탄약 차량 식량 등 군수물자는 이후의 전쟁에서 중공군에 의해 요긴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청천강 전투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 후 계속 패주하던 미군은 1950년 12월 23일경 임진강, 한탄강에서 겨우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만약 미 8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패하지 않고 전력을 보존했다면, 현재의 남북군사분계선은 청천강이나 대동강을 연하는 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 격렬한 반대로 한반도 철군 결정을 뒤집어

한편 같은 날인 12월 23일. 8군 사령관 워커가 전방의 시찰과 함께 아들 샘 워커에게 훈장을 수여해주기 위해 지프를 타고 이동하던 중 양주 도봉리 인근에서 국군 트럭과 충돌해 사망하였다(당시 트럭 운전병은 사형당할 뻔했다). 그리고 26일에 워커의 뒤를 이어 새로운 사령관으로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임명되었다.

게다가 임진강-한탄강 전선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결국 연합군은 1951년 1.4 후퇴를 결정하면서 서울을 다시 포기하고 평택-원주-삼척선까지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임 매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신속히 미군의 전열을 수습하고 2월 11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2월공세’시 지평리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켜 반격하지 않았다면 미군은 아예 한반도 전체를 포기하고 철군 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중공군 제 2차공세시 청천강 전투는 미군에게 실로 어이없고도 심각한 피해를 안긴 한방이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그 당시에 미 육군과 합참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서 철군 승낙까지 얻어냈었다. 그러나 리지웨이 사령관은 그에 대해 맹렬히 반대하며 죽어라 싸웠기에 철군 결정이 뒤집힐 수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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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7) 중공군 입장에서 본 한국전쟁의 분수령, 제2차공세시 청천강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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