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32) ]‘무적해병’신화를 만든 ‘도솔산전투'의 진짜영웅 이근식 소위
해병대, 적이 예상 못한 야간 기습공격 감행해 24개 고지를 하나씩 점령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철수는 했지만 당시의 전투지역은 고지대이기 때문에 식사추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들은 2일째 식사를 못하고 건빵과 물만 먹고 마시며 전투를 하고 있었다. 얼마후 2일간 밀렸던 식사가 노무자들의 지게로 운반되어 도착했다.
소대원들은 소금과 함께 주먹만한 삶은 쇠고기 덩어리를 반찬으로 철모에 수북히 담겨있는 밥 2일분을 다 한끼로 먹어 치웠다. 대원들의 얼굴에 희색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우리는 5시간 정도 푹 쉬고 잤다. 재 공격을 위한 휴식 시간이었다.
그 와중에 중대 통신병이 SCR-300 무전기를 가지고 3소대장 이소위에게 왔다. 1대대 작전장교(서정남 대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렸다.
■ "국가를 위한 희생은 사치품 같은 소리…,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뿐"
"3소대장, 공격하느라 수고가 많지? 대대장님(공정식소령 해사1기, 훗날 해병대 사령관 역임)께서 이번 공격에서는 반드시 '무명고지'를 점령하도록 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었으니 필히 점령하라"는 지시와 함께 격려하는 교신이었다.
얼마나 상황이 긴박했으면 대대 작전장교가 중대장을 제치고 공격소대장에게 직접 목표점령을 지시했을까? 그 특별지시는 소대원들에게 큰 격려가 됐고 이번 공격이 얼마나 책임이 막중한 임무인가를 다시 깨우쳐 주었고,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17:00시, 2차 공격준비를 위해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켰다. 총원 40여명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소대장을 포함하여 23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번쩍이고 있었다. 그속에는 살기가 있었다. "견적필살(見敵必殺)"의 각오였다.
이소위는 살아남은 소대원들에게 "자, 아침 공격에서 우리는 많은 동료 해병을 잃었다. 그러나 목표는 점령 못했다. 이번에는 필히 목표를 점령하여 전우의 원수를 갚는 거야. 인명은 재천이다. 나를 봤지? 적탄에 맞았어도 나는 살아있지 않나…"라며 분발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물이 나왔다. 대원들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지만 그들은 아무말 없이 그의 지시에 묵묵히 따랐다. 이제 공격을 개시하면 소대원 중 누군가 적탄에 맞아 부상당하거나 죽을 것이고 그것이 운을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제 곧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
그들은 이 때 무엇을 생각 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우기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죽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는 사치품과 같은 소리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 명령에 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죽음이란 남의 일 같이 생각되었다. 오로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전해졌다.
오전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이소위는 산악 지형의 특성으로 총보다 수류탄이 더 효과적인 공격임을 깨닫고 수류탄을 4개씩 분배했다. 소대원들의 손을 잡으며 “동료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류탄 공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점령 할 것이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손을 굳게 잡은 대원들의 얼굴은 무표정 했다
17:55분, 미 해병대의 항공기 와 155mm야포의 공격준비사격을 지원받고 5분 뒤에 그들은 다시 그 지긋지긋한 공격대기지점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이소위는 목표 정상에 우선 뛰어 올라가 수류탄 돌격공격을 하기위해 3명의 특공대를 편성했고 중대장에게 연막차장 지원을 요청했다. 이윽고 멀리 후방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105mm 연막탄이 "쉬"소리를 내며 우리의 머리 바로 위를 지나 목표 너머 에 떨어졌다. 이어서 제3탄과 제4탄이 날아와 정확히 목표상에 다시 명중했다.
이소위는 무턱대고 일어서서 착검을 한 총을 들고 연막 속으로 목표 정상에 뛰어 올랐다. 연막으로 인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적이 파 놓은 호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그 순간 적의 박격포 포탄이 나의 왼쪽에서 폭발했다. 나는 다시 나의 왼쪽 무릎부분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때마침 옆을 보니 특공대로 자원한 자동화기사수 고호선해병이 바로 오른쪽 호 속으로 뛰어들어 왔다. 호 속에는 적의 시체가 있었다. 아직 체온을 느낄 정도였다. 정상에 소대장과 함께 둘이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들이 들어있는 호 앞 너머에서부터 그 지긋지긋한 소련제 수류탄이 역시 검은 연기를 뿜으면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까맣게 마치 까마귀 떼가 죽음의 사신으로 그들을 향하여 날아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전부 그 둘의 머리 위로 지나쳐 뒤에서 폭발했다. 그런데 그 중의 1발이 고해병이 있는 호 속으로 떨어졌다. "앗" 하며 놀라는 순간 고해병은 적의 수류탄을 주워 적진으로 되던졌다. 적진에서 "쾅"하고 터졌다.
계속 20~30발 정도의 수류탄이 날아오더니 뜸해졌고 잠시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하고 둘의 것을 모으니 수류탄이 8발이다. 이소위는 오전 공격을 통해 적이 바로 앞 너머 10m정도 지점에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격발한 후 멀리. 가까이 그리고 좌우로 고루고루 적진에 던졌다. 자동화기사수 고해병은 적의 역습에 대비해 경계했다.
"쾅,쾅…"하는 소리가 바로 앞에서,오른쪽.왼쪽에서. 그리고 멀리서 들렸다. 8발의 수류탄 폭발 소리를 세었다. 조용해졌다. 이제 육박전을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무아지경으로 무명고지 정상에 우뚝 올라섰다. 고해병도 뒤따랐다. 앞에 도망가는 적들이 보였다.
그는 "돌격 앞으로!"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의 "돌격명령"은 적 격멸과 동시에 목표를 완전히 점령하고 방어중에 있던 적을 소탕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보다 더 컸다. 그리고 자신감에 찬 승리의 소리였다.
그러나 "와" 하는 해병들의 돌격 함성은 들리지 않았다. 뒤돌아 와서 고지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소대원들은 굴러오는 적의 수류탄을 피해 정상에서 30~40m 아래쪽으로 물러서 엎드려 있었다. 그래도 이소위는 다시 소대원들을 향해 "돌격 앞으로"하고 도주하는 적을 쫓았다.
대원들이 쫓아오건 말건 좀 무모했지만 그리고 쫓아가 적을 잡아서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도망가는 적 1명을 뒤에서 덮쳐서 잡았다. 쓰러진 적을 일으켜 꿇어 앉히고 그 머리에 총구를 댔다. 죽이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런데 전사한 해병들의 얼굴이 눈 앞에 떠 올랐다. 동시에 그들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 적을 보니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무슨 짐승의 얼굴로 보였다.
그래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적의 얼굴이 보였다. 그 포로는 무릎을 꿇고 마치 파리가 두 앞발을 비비고 있는 것 같이 양손바닥을 부쳐서 비비면서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라고 했다. 그 절망에 찬 애절한 표정의 그 얼굴에서 다시 전사한 부하 해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수많은 해병들의 희생의 댓가로 이 적을 사살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총구를 치우고 "일어섯" 했을 때, "살았다"하는 안도와 감사의 표정을 보이던 그 포로의 얼굴에서 죽음과 삶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자비를 베푸는 자의 희열을 맛본 것 같았으며 결국 그 포로를 사살하지 않고 후송시켰다.
그리고 이소위는 목표를 점령할 때 바로 옆에 떨어진 적의 박격포 포탄의 파편에 의해 몸의 왼쪽 부분, 겨드랑이, 왼쪽 다리 특히 무릎 관절 속으로 파편창을 입은 것을 잊고 있다가 목표 점령 후 긴장이 풀려서 인지 왼쪽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쓰러졌다.
이근식 소위는 어두운 밤길 고지 능선을 따라 덩치 큰 3.5인치 로켓포 사수의 등에 엎혀 밤새 10시간 동안 넘어지고 뒹굴면서 동이 틀 무렵에 구호소에 도착했다. 그는 간단한 응급치료를 받고 미군 헬리콥터에 실려 원주를 거쳐 미군 수송기편으로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1개월간 입원치료 후 퇴원하여 다시 전투에 임했다.
■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한 대승리
그러나 계속된 교전으로 피해만 늘어나자, 2중대 3소대장 이근식 소위가 수류탄을 이용하는 맹활약으로 중간 목표를 일몰 이후에 점령했던 사례를 참고로 해병대 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정상적인 주간 공격보다는 적이 예상치 못한 야간공격으로 적을 기습하기로 결심했다.
1해병연대는 6월11일 02시에 무지원, 무조명하 야간공격을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3시간 만에 방심했던 적들의 주저항선을 돌파하고 전과확대로 전환하여 대암산(1,314고지, 목표15)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국군 해병의 공격기세를 유지한 계속 공격으로 전투력이 저하된 인민군들은 6월19일 도솔산(목표24)을 포기하고 대우산으로 도주함으로써 ‘도솔산전투’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이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개인 및 공용화기 등 198점을 빼앗는 큰 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으로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전투 중 적들이 노획한 아군 무전기로 감청을 잘하자 해병 1연대 장병들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제주 출신들에게 당시 잘알려지지 않은 제주 사투리로 무전 교신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4.3사건’으로 자신 및 가족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기위해 입대한 제주도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26일, 국군 해병 1연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無敵海兵)’ 이라는 휘호와 함께 부대 표창을 받았다. 또한 연대장과 이근식, 오정근, 김의태 소위는 미 은성무공훈장, 대대장들과 고호선해병 등에게는 미 동성무공훈장, 2중대장에게는 "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