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5-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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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6차공세(’51.5.15~5.22) 이후 유엔군의 북진 상황도 [사진=육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 기간 중에 유엔군 총사령관(미군 사령관)은 맥아더(~1951년 4월)원수를 시작으로 리지웨이(~1951년 12월)와 밴플리트(~1952년 5월) 대장이 6~8개월 동안 지휘하다가 4번째인 클라크( ~1953년 10월) 대장이 가장 장기간인 17개월 동안 중공군 공세와 맞서 싸우며 정전협정에 조인했다.


이때 밴플리트 대장은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 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 하였다. 그러자 미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중공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상공에 세균에 감염된 곤충을 대량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며 유엔군 지휘부를 흔들어 군사작전과 정전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의 여건을 만들며 용전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

미 8군사령관들이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영전 및 겸직하면서 5번씩이나 교체됐다.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1950년 7월4일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해서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계속했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여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항미원조(抗米援朝)를 외치며 불법 침범한 중공군의 최고사령관 펑더화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T-34, 야크기 등을 지원받아 북한군 7개 사단으로 남침했는데, 이 중 4개 사단은 모택동 팔로군에서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또한 33개월의 전쟁기간 동안에 북한 인민군이 주축이 된 전투는 개전초기부터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북진할 때인 3~4개월이었고 상단의 북진 상황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배치와 같이 나머지 약 30개월은 대부분이 중공군과의 전투였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내전이 아니다. 소련과 중공이 주도한 공산주의·전체주의·제국주의 세력의 일방적인 침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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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6·25 남침전쟁 기간중 유엔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맥아더(~1951년 4월), 리지웨이(1951년 4~12월), 밴플리트(1951년 12월~1952년 5월), 클라크(1952년 5월~1953년10월)장군 모습 [사진=전사편찬연구소]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중공군은 계속된 공세 감행


개전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루던 1950년 8월12일 미 공군은 두만강 연안 나진 일대를 폭격했다. 이에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되던 9월11일경 중국은 북한과 미국 양측에 중재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재탈환하자 중국은 9월30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방관하지 않겠다고 유엔에 경고했다. 10월3일 미군이 38도선을 넘으면서 중공군을 파병하겠다고 워싱턴에 통보했다.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되자 중국은 ‘중국 인민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공 행위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고 10월20일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를 불법 침범하는 구실로 제시한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유엔군은 패퇴하여 38도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한편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리지웨이가 8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이 때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군의 원폭 사용과 일본군 투입을 공언하여 정치적 문제가 되는 가운데 중공군의 동계 대공세로 불리는 신정 3차공세에 밀려 서울을 내주고 1.4후퇴를 한 상태여서 입지가 무척 좁아졌다. 


그는 계속해서 워싱턴과 반대되는 만주 폭격 등 공세적인 견해를 내놓았으며 트루먼 대통령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 듯했다. 결정타는 1951년 4월 5일 공화당 마틴 의원에게 보낸 편지가 하원에서 낭독된 것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하기로 결심했다.


많은 망설임과 혼란 속에서 백악관은 4월 9일 새벽에 맥아더의 해임을 공표했고, 이로 인해 트루먼 행정부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4월 19일 맥아더가 하원에서 행한 연설은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당시만 해도 맥아더가 출마를 하면 바로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후에 맥아더가 상원 청문회에 나와 전쟁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그의 인기는 급락했다. 하원에서 연설 당시가 맥아더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후임(유엔군 사령관)으로는 8군 사령관 리지웨이가 임명되었고 리지웨이의 자리는 밴플리트 장군이 맡았다.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22일 중공군은 유엔군 지휘부 교체의 틈을 이용해 5차 공세(춘계공세)를 시작했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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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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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3)]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중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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