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5-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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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6·25 남침전쟁에서 맹활약한 후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으로 영전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1951년 4~12월)대장과 그 후임으로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 8군 사령관을 겸임한 밴플리트 대장 [사진=전사편찬연구소]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리지웨이는 1950년 12월 육군 참모차장으로 재임 중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 전선에서 맹활약을 했다. 1951년 4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해임되자 대장으로 승진한 리지웨이는 제2대 유엔군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 그리고 제2대 GHQ(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라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을 통치하면서 한반도의 유엔 연합군을 지휘하게 됐다. 


정전협상에서 리지웨이는 일찍이 서울을 압박할 개성시의 전략 전술적 가치를 알아차려 개성을 대한민국이 반드시 차지하거나 적어도 중립지대로 할 것을 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으며 개성을 되찾을 군사 활동 또한 계획하였다.


그러나 전쟁에 질려 있던 미 정부와 언론에게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반응만 나와 개성 되찾기를 결국 포기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은 38선 이남으로 휴전선이 형성됨으로써 서울이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이 위협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북한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등 대남 도발사를 볼 때에도 휴전선에 근접한 서울에 대한 코리안 리스크가 한국의 고질이 된  상황을  미리 식별한 리지웨이의 당시 판단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년 뒤인 1952년 4월28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해제하고 일본을 서방 자유진영에 편입시킴으로써 리지웨이는 GHQ 최고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5월, 리지웨이는 미국 대통령 후보에 오르게 된 아이젠하워 원수의 뒤를 이어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직에 올랐다. 한편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미 8군 및 유엔군사령관 자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사관학교 동기인 밴플리트(1951년 12월~1952년 5월) 중장이 대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이어받았다.


적군 시체나 포로를 와서 보지않을 거라면 ‘밴플리트 포격'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


6·25 남침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플리트는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과 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전쟁 물자는 여기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시 유명한 ‘발지 전투’를 지휘했던 밴플리트는 대전 후인 1948년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중공군의 무지막지한 물량 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했다. 이것은 ‘밴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5월에 벌어진 중공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밴플리트 포격’ 방식은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어 화력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덕분에 사상율이 높아져 피해가 폭증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됐고 그 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 산악 기동전'도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무력화 되었다. 


게다가 이 '밴플리트 포격'에 힘입어 미군은 적이 있거나 이용할 만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할 정도였다.


한편 밴플리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 커녕 그가 혈세로 만든 탄약을 필요 이상 펑펑 날리고만 있으니 의회에 출석시키자고 주장했다. 


한편 밴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으나, 상황이 상황이고 미국도 포탄 가격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2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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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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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5)] 중공군의 계속된 공세로 유엔군사령관 4번이나 교체(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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