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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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남침전쟁 중 워커 장군의 순직으로 한국 전선에 부임한 미 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한 모습과 우측 한국을 방문한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을 수행하는 리지웨이와 밴플리트 장군 모습 [사진==(사)월드피스자유연합‘생명의 항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12월 교통사고로 순직한 워커 중장의 후임으로 미 8군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미국 입장에서 한국군 부대들이 공산군에 투항하는 사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국공내전)에서 많은 국민당 군대가 공산군에 투항해서 편입되었고 한국에 침입한 병력의 다수가 원래는 국민당 군대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한국수호 의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아 미군 합동참모본부에 작전지침을 요청한 맥아더가 받은 지침에 “기본적 임무가 '일본의 수호'이고 아주 어려운 상황에선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담겼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을 지킬 마음은 확고했지만 전략적 가치가 작다고 판단된 한국은 사태가 불리해지면 언제라도 버릴 생각이었다.


이처럼 중공군의 개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맥아더의 유엔군은 지상군사령관 겸 미 8군사령관이던 워커 장군을 잃어 새로운 사령관이 필요하였고, 당시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받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할 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이런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맹위를 떨쳤던 리지웨이 장군이 새로 부임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 각하, 나는 당신을 만나 기쁘고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기쁘며 나는 여기 머물 생각입니다(I'm glad to see you, Mr. President, glad to be here, and I mean to stay)"라고 인사했다. 


그제야 1.4후퇴와 워커장군의 순직으로 굳었던 이 대통령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어 리지웨이는 한국군 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직 하나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면 귀하의 국민들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합니다. 우리 통합된 연합군에겐 오직 하나의 공통된 운명만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렇게 각오를 밝힌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의 보급 및 전투근무지원 능력이 2주정도라는 것을 식별하는 통찰력과 강한 추진력으로 지평리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의 승리를 통해 서울을 재탈환하는 등 중공군의 공세에 반격을 가하며 전선을 북쪽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만들어 다짐한 약속을 실천했다.


또한 리지웨이 장군은 회고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무력통일론은 집요했고, 한국은 인적 자원이 많으므로 무기를 달라고 끊임없이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 속으로 이 용감한 노신사에 대해 존경과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라며 이 대통령에 대한 심경을 피력했다. 


이어 “공산당에 대한 증오와 그 자신의 국민들을 위해 매우 편견에 가득 차 있기는 했지만......그리고 더 나아가 거의 불가능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지만, 그는 전 생애를 통해 헌신한 그의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이같이 행동하고 있었다”라고 이 대통령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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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6·25 남침전쟁에서 맹활약한 후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으로 영전한 리지웨이(1951년 4~12월)와 그 후임으로 미 8군 사령관을 겸임한 밴플리트와 4대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 [사진=전사편찬연구소]

 

리지웨이가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자 클라크 대장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 


1951년 4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해임되자 대장으로 승진한 리지웨이는 제2대 유엔군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 그리고 제2대 GHQ(일본 점령 연합군 최고사령부) 최고사령관 자리에 올라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을 통치하면서 한반도의 유엔 연합군을 지휘하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동을 받아 존경심을 갖고있던 리지웨이는 일찍이 서울을 압박할 개성시의 전략 전술적 가치를 알아차려 대한민국이 개성을 반드시 차지하거나 적어도 중립지대로 할 것을 본국에 강력히 요청하였다.

 

그리고는 개성을 되찾을 군사 활동 또한 계획하였다. 하지만 전쟁에 질려 있던 미 정부와 언론에서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반응만 나오자 리지웨이는 결국 개성 되찾기를 포기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부전선은 38선 이남으로 휴전선이 형성됨으로써 서울이 북한의 장사정포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이 위협이 그대로 유지되는 가운데 북한 김신조 일당의 1.21사태 등 대남 도발사를 볼 때에도 휴전선에 근접한 서울에 대한 코리안 리스크를  미리 식별한 리지웨이의 당시 판단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년 뒤인 1952년 4월28일,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해제하고 일본을 서방 자유진영에 편입시킴으로써 리지웨이는 GHQ 최고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5월, 리지웨이는 미국 대통령 후보에 오르게 된 아이젠하워 원수의 뒤를 이어 북대서양 조약기구 최고사령관직에 올랐다.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클라크 대장이 유엔군사령관(~1953년 10월)으로 부임하면서 잠시 공석이 되어 유엔군사령관직을 겸임했던 밴플리트는 미 8군사령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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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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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 (59)]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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