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1-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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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밴플리트 장군의 외손녀 에이브리 라이더 미 육군 소령이 지난 2001년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동상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과 우측, 1952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앞 좌석)이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뒷줄)과 제주도를 시찰하는 장면 [사진=육사/정부기록보존소]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 남침전쟁이 지루한 고지전이 계속되면서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밴플리트와 사관학교 동기인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이나 콜린스 육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 대부분이 한국에서의 전쟁을 모양새 있게 마무리하는 데 급급했다.


밴플리트는 그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대상이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였다. 그런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했기에 곧 분위기를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그에게는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밴플리트는 승리 위해 싸웠던 군인이자 한미 관계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그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아이젠하워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군 전력증강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전쟁 끝내기’를 공약했고,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소련과 동유럽 및 중국 등 사회주의 세력에 대항해야 한다는 전략 구도를 구상했던 워싱턴 미군 수뇌부의 심경에도 변화가 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1953년 1월 현역에서 은퇴하여 그해 2월 한국을 떠나는 밴플리트의 심정이 편할 리 없었다. 순천폭격 비행 중에 실종되어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 대위를 잃었던 전선으로부터 이제 떠나야 하는 아비의 심정도 있었을 것이고, 군인으로써 못내 이루지 못한 전선에서의 온전한 승리가 아쉽다는 정한도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런 그는 당시의 고별 기자회견에서 1951년 10월과 11월 벌인 공세의 좌절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 공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은퇴 후 미국에 도착한 밴플리트는 각종 환영행사 등에 참석하면서도 아이젠하워 등 요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 전선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며 끝까지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그는 맥아더와 같은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의 ‘사려 깊은 외교적 시야’를 우습게 본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전쟁을 벌였다면 상대의 수도까지 진격해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장군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정가에서는 밴플리트를 의심하고 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그의 그런 언행을 두고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한다”고 발언했고, 이 말을 전해들은 밴플리트는 “도대체 그가 왜 그런 발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이라며 아쉬워했다.


한편 밴플리트가 고향인 플로리다에 막 정착했을 때, 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에 올랐던 월터 스미스가 플로리다 목장의 밴플리트를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북진까지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하고 있다. 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장군께서 주한 미 대사를 맡아주면 좋겠다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말했다”는 취지로 주한 미 대사를 맡아 주기를 제안했다.


밴플리트는 즉석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이 대통령이 당신들의 말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정전 자체에 반대하는 내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래도 월터 스미스는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도 장군의 의견이라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설득했다.


군인의 순수한 입장으로 ‘한국 전선에서의 승리’를 주장했던 밴플리트는 확고했다. 그는 “결코 안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강요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사표를 내야 할 것”이라며 제안을 일축했다. 완고한 밴플리트의 입장을 전해들은 아이젠하워는 결국 대사 임명 계획을 철회했다.


저돌적인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의리의 사나이 돌쇠’


제2차 세계대전과 그리스 반군 게릴라 소탕 작전에서 성공적 임무수행에 이어 한국 전선에서 이름을 높였던 밴플리트는 고향 플로리다의 유명인사 대접을 받으며 목장과 관련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때 플로리다의 많은 유지들에게서 “주지사 선거에 나가라. 당신 정도면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정치 입문 권유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냥 당신들이 나가라. 나는 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퉁명스럽게 되받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밴플리트는 한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계속 키웠다. 한국과 미국의 최고 교류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발족과 발전을 주도했다. 아울러 한국의 전후 지원 문제를 두고 미 행정부의 자문역을 맡아 활동하는가 하면 실제 집행과정을 감독하기 위한 순회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퇴임 뒤에도 한국을 자주 방문했다. 그의 후임 미 8군사령관인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사실 그 점이 매우 거북했다고 한다. 전임자가 자신의 임지에 자주 나타나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00마일로 차를 모는 ‘직진 스타일’ 군인 성격의 밴플리트는 그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의 열정 그대로 한국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오직 승리만을 위해 뛰었던 미국의 장군이었다. 공산주의 위협에 직면했던 대한민국에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우의가 아주 깊을 수 밖에 없었다. 


훗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망명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밴플리트는 주저 없이 이 대통령의 곁으로 달려갔고, 그의 유해를 직접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의리의 사나이 돌쇠’이기도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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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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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63)] 이승만 대통령과 역대 유엔군 총사령관의 치열한 밀당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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