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5-14(금)
 


육대올림픽노태우.png
▲ 88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주관한 사마란치 위원장과 노태우 대통령 모습 [사진=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8서울올림픽은 역대 최대규모인 159개국 8,397명이 참가해 9월17일 토요일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올림픽은 통상 오후 3시에 시작되었는데 국가 이미지 모토인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맞췄 오전에 개최했다고 설명했으나, 미국 올림픽 방영권을 독점하고 있는 NB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설이 있다. 마침 토요일이 반공일이었는데 그 덕분에 개회식 당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성화대도 올림픽 사상 최초로 계단식이 아닌 엘리베이터(보이지 않게 피아노 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서 두레박처럼 끌어올림)방식을 도입했다. 이후 새로운 점화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반면에 외국 언론들이 한국인의 개고기 식용문화를 앞다퉈 보도하며 엄청나게 지탄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림픽 기간 전부터 개고기 음식점을 강력하게 단속했는데 이때부터 ‘사철탕’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판매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한편, 88서울올림픽은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양대 진영의 냉전 구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격전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개최된다는 점에서 공산 진영의 참가 문제가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88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 했으나,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은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증언이 얼마전에 공개된 1988년 외교문서에 나왔다.


당시 주 파키스탄 한국대사대리는 1988년 8월 7일 외무부 등에 보낸 전문에서 사흘 전 주 파키스탄 중국대사관 참사관에게 들었다며 "중국이 철도편으로 북한과 판문점을 경유하여 올림픽 선수단을 서울에 보내려고 북한과 교섭했으나 북측이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88 서울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선수단은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특히 4년 전인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의 안전'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로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의 불참으로 반쪽 올림픽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88서울올림픽 개최 5년전에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 등으로 냉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88서울 올림픽을 최대의 축전으로 만들기 위해 소련 등 동구권도 참가 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더 이상 보도하지 못했다. 


소련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국내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노력으로 결국 소련이 참가를 결정하면서 소련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됐고 동구권들의 참가로 역대 최대규모의 올림픽 제전이 되었다.


반면에 88서울올림픽에 불참한 북한은 한국에 뒤지는 것을 만회하고자 이듬해인 1989년에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으나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면서 경제난으로 이어져 훗날 3대 실정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전해진다. (다음편 계속)

 

태그

BEST 뉴스

전체댓글 0

  • 71228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직업군인 사용설명서(99)] 88서울올림픽이 직업군인에게 남긴 잔상②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