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noname0123.png
북한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마오안잉(毛岸英)의 묘소. [사진=중국 바이두 캡처]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인 천안문 앞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오늘도 마오쩌둥은 천안문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국 사람들과 친밀하게 눈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중국 인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이 공산혁명을 이끌고 신 중국을 건국한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큰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을 6.25 전쟁터에 보냈고, 전사한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운구하지 않고 북한 땅에 묻었던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 마오쩌둥은 많은 중국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자원해서 전쟁터로 나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도 그들과 똑 같이 전쟁터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전사하자 일반 중국 청년 전사자들과 똑같이 북한 땅에 묻으라고 했다.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지 않은 것이다. 천안문 앞 초상화의 마오쩌둥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북한 땅에 잠들어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지금부터 마오쩌둥의 슬픈 가족사를 알아보겠다.

 

마오쩌둥은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베이징 대학의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이 때 베이징대학 교수 양창지(陽昌濟)의 집을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양 교수의 딸 양카이후이(陽開慧)를 만나게 됐고, 두 사람은 공산혁명의 뜻을 함께하는 동지애를 가슴에 품고 결혼하여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혁명가 부부인 이들의 삶은 단란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양카이후이는 1930년 국민당 국부군에게 아들 3형제와 함께 체포됐고 “공개적으로 마오쩌둥과 이혼하고, 공산당을 탈당하면 살려주겠다”라는 회유를 받았지만, “나는 내 남편의 혁명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라며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거부했다. 결국 양카이후이는 살아남지 못했고, 이 당시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마오쩌둥은 부인이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목숨 백 개로도 속죄할 수 없다”라고 애통해 하였으며,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이 집권한 이후 국부의 부인으로서 공식 추모되었다. 하지만 모친을 잃은 3형제는 돌봐줄 사람 없이 중국을 떠돌았다. 이 때 마오안잉의 나이가 겨우 8살이었다. 이후 모친을 잃은 충격으로 막내아들 마오안롱(毛岸龍)은 병을 얻어 사망했으며, 둘째 아들 마오안칭(毛岸靑)도 평생을 정신질환에 시달렸다고 한다.

 

마오안잉과 마오안칭은 공산당원의 도움으로 1936년 소련으로 건너갔다. 마오안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 소련군에 자원입대하고 1943년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4년에는 중위 계급으로 전차중대 정치장교로 배치돼 독일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의 요청으로 1946년 10년 만에 다시 중국 땅을 밟았다. 스탈린은 마오안잉이 귀국을 앞둔 어느 날 그를 초청하여 덕담과 함께 권총 한 자루를 주었다고 한다.
 
마오안잉은 어느덧 24세의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서 마오쩌둥 앞에 나타났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을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마오안잉은 1949년 10월에 류쑹린(劉松林, 후에 류쓰치(劉思齊)로 개명)과 결혼했다. 전사하기 1년 전이었다.

 

마오쩌둥은 건국 후 1년도 되지 않았지만 6.25 전쟁에 파병을 결심했다. 이 때, 마오안잉은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조선으로 보내주십시요”라며 참전 의사를 밝혔고, 마오는 “과연 내 아들이다”라며 즉석에서 허락했다. 하지만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안잉을 어디 배치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마오의 아들을 최전선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이 소련어에 능통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사령부 소련어 통역요원으로 배치했다.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라고 여겨 사령부에 배치했지만 인간의 일이란 알 수 없는 법. 마오안잉은 전쟁에 투입되고 약 1개월이 지난 50년 11월 25일, 그 안전한 지역에서 미군 B-56 폭격기의 소이탄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전사에 관해 2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첫째는 미군의 폭격에 모두 동굴로 대피하고 있었는데 마오안잉은 이 때 본국에서 오는 전문을 받으러 문서수발실로 가다가 소이탄 폭격을 받았다는 설이고, 둘째는 북한군이 중공군 지휘부에 계란 한 꾸러미를 선물로 보냈는데, 마오안잉이 사령부 요원을 위해 계란볶음밥을 만든다고 불을 피운 순간 이 불빛을 따라 소이탄이 날아왔다는 설이다.

 

그래서 일부 중국인은 마오안잉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아직도 10월과 11월에 계란볶음밥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마오안잉의 생일인 10월 24일에 계란볶음밥 조리법 동영상을 올렸던 파워 블로거 요리사 왕강(王刚)은 이로 인해 문자폭탄을 받기도 했다. 왜 하필 이날에 그런 동영상을 올리느냐고...

 

펑더화이와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마오안잉의 전사 사실을 어떻게 보고할 것인지 고민이었다. 한 달 이상을 지체하다가 해를 넘겨 1951년 1월 마오쩌둥이 “안잉이는 잘 있는가”라는 물음에 저우언라이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망연자실하여 한동안 말이 없다가 눈시울을 붉히며,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탁자 위의 담배를 찾는데도 한참동안 더듬거렸다고 한다.

 

중국 공산혁명의 지도자 마오쩌둥도 아들의 전사 소식에는 어느 아버지와 똑 같았다. 마오쩌둥은 그의 부인 양카이후이 총살 소식에 그리고 큰아들 마오안잉의 전사 소식에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속으로 한없이 울었을 것이다.

 

중국 내부에서는 불타서 흔적도 없는 유해이지만 마오안잉을 중국으로 운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마오안잉의 젊은 부인이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20세였다. 이때도 마오쩌둥은 “안잉을 북한 땅에 묻어라, 전사한 병사들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들과 똑 같이 하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아들 마오안잉에 대한 특혜는 없었다. 

 

마오안잉의 부인은 남편을 추모하러 북한에 자주 간다. 20세에 남편 마오안잉을 잃은 그녀는 이제 90세를 넘겼다. 북한은 그녀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정성껏 접대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외교 현안을 해결한다. 북한 땅에 잠들어 있는 마오안잉은 아직도 중국과 북한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김한경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태그

전체댓글 0

  • 7007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숨은 중국 알기 (5)] 북한에 묻혀있는 마오쩌둥 아들과 중공군 묘지의 의미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