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중국 알기 (9)] 중국 한반도 전문가, 정체된 북한 아쉬워하며 한국 높이 평가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 월드컵 일치된 응원과 질서의식, 동북공정 한 목소리 대응 등 주목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는 베이징 근무시절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나를 통해 한국의 정책과 생각을 알아보려고 했기 때문에 접촉이 필요했다. 중국의 對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싱크탱크인 그들은 향후 정책을 구상 중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도 자신들이 건의한 정책이었다고 한다. 내가 만난 중국인 한반도 전문가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째, 그들은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수교 이전에 북한에 유학하여 대부분 김일성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정적으로 북한과 가까웠다.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였고,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교류가 빈번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2001년 9월 북한 방문을 마치고 와서 ‘친척집에 다녀왔다(走親戚)’라고 말할 정도였다.
둘째, 북한을 경외롭게 보고 있었다. 이들이 북한에 있던 시기는 대략 70~80년대였다. 이 당시에는 북한도 경제적으로 그럭저럭 괜찮았고, 어떤 면에서는 중국보다 나았다. 한 연구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평양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을 갔는데 기숙사 휴게실에서 칼라 TV를 처음보고 무척 놀랐다. 당시 중국에서 칼라 TV는 드물었다”고.
그래서 그는 “중국 인민들은 언제 칼라 TV를 볼 수 있을까? 북한이 부럽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 다른 연구원은 북한에 대해, “그 작은 나라가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미국에 대항하는지 모르겠다. 그 결기가 대단하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셋째, 한국이 북한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한다. 이들 연구원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서울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점차 남북한과 한반도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묶은 호텔 창밖에 비친 역동적인 서울의 모습과 활기찬 야경에서 앞으로 한반도의 주인은 남한이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들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은 어둡고 정체된 평양과 도저히 비교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남북한은 같은 민족인데 평양이 왜 이정도로 발전을 못하는가 하는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이런 아쉬움은 북한과 교류했던 많은 중국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사항이다.
북·중 접경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한 연구원은 60년대와 70년대 이야기를 한다. 당시 두만강의 제방은 북한쪽이 훨씬 높고 튼튼해서 물난리가 나면 전부 중국 쪽으로 범람해서 북한은 멀쩡한데 자기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반대로 중국 쪽 제방은 견고한데 북한쪽 제방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북한이 항상 홍수 피해를 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연구원은 자기가 어렸을 때, 북한 학용품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북한을 왕래하는 친척들이 건네주는 북한산 연필, 공책, 책가방 등은 중국 제품과 비교할 수 없이 고급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지금은 달라져 중국 학생들은 북한산 제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오히려 중국 학용품이 북한에서 고급품으로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한때 북한을 좋아했던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이 왜 이렇게 정체되어 있는가 하고 무척 아쉬워한다. 그들은 아직도 심정적으로는 북한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어떠할까? 우선 공통적으로 한국을 높게 평가했던 3가지의 사례를 들겠다.
첫째, 전 국민이 한마음이 돼 참여했던 1997년 ‘금모으기 운동’이다.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금목걸이, 아기 돌 기념 금반지, 포장도 풀지 않아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금수저 등을 국가를 위해서 내어 놓는 것을 보고 경탄 했다.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애국심이란 것이다. 강요된 것도 아니고 애국주의 공교육의 결과도 아니며, 국가를 위한 자발적인 마음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둘째, 2002년 서울 월드컵에서 보인 붉은 악마를 포함한 전 국민의 일치된 함성과 질서의식이다. 중국인들은 시청광장이든 호프집이든 일치단결하여 응원하는 한국인의 모습에 가슴 뭉클했고, 응원이 끝나면 자발적으로 주변을 정돈하고 깔끔하게 떠나는 질서의식에 경의를 표했다고 했다. 역시 당시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선진화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중국의 동북공정에 보인 한국인들의 대응이다. 당시 우리들은 중국이 우리 고대사인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당(唐)제국의 지방정부로 격하시켜, 자국의 역사에 편입하려는 계획에 반발하고 분노했다. 이때는 여·야도 없었고 진보·보수도 안보였다. 오직 한 목소리로 중국을 성토했고 중국도 한걸음 물러났다. 이 문제로 한국인을 전부 반중국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2006년 9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에게 “학술연구기관의 연구 차원이라고 하지만 이런 문제가 양국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유감을 표명하자 원자바오 총리도 “관련 학술연구기관의 일이기는 하지만, 양국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지시했으며, 정부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화답했다.
전 국민의 지지를 받은 노 대통령의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고, 중국도 이를 존중한 것이다. 이 때 한국과 중국은 작은 나라 큰 나라 관계가 아니었다. 역사 문제와 국가이익을 앞에 두고 대화하는 동등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였다.
그런데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한국이 왜 자국 군대의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가’이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맞대응을 미국이 적절히 억제함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조절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전작권 문제는 한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필자가 중국에서 접한 중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심정적으로는 북한을 좋아했지만, 남북 경쟁의 무게 추는 한국으로 기울었다는 현실 감각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국론이 분열되면 중국은 물론 어느 나라도 우리를 쉽게 흔들 수 있어 한 목소리가 중요함을 깨닫게 됐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