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육대다부동2.png
▲ 다부동지구전적비 및 기념관 전경 [사진=보훈처]

 

[시큐리티팩트=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 1기병사단 정면의 적은 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 전폭기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축선에 집중되었다.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은 약 2만1500명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다. 


마침내 8월 20일 정면공격을 시도했던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북한군 15사단은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다.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축선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55일간이나 계속되었던 다부동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2만여 명과 국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주어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장맛비가 내리던 9월이 되자, 드디어 김일성 군대의 낙동강 전선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김점곤 중령의 국군 1사단 12연대가 최초로 다부동 혈로를 뚫고 12㎞를 북상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태그

전체댓글 0

  • 60698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6)]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④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