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중국 알기 (10)] 중·소 분쟁 당시 북한이 취한 ‘전략적 모호성’의 실익과 한계
“상황에 따라 필요하지만 유효기간이 짧아서 언젠가는 선택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 맞게 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이들과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며, 최소한 적대관계는 피해야 한다. 주변국들이 우리에게 외교적으로나 정치·경제적인 압박을 가하면, 이를 상대해서 국익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군사적 압력 상황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중국과 북한 관계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몇 차례 중·북 관계를 언급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주변 강대국 A의 압력을 견제하기 위해 다른 강대국 B를 끌어 들였을 때, B가 과도한 요구를 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이번에는 A와 B가 우리를 배제한 채 타협을 한다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약소국 입장에서 제일 좋은 방법은 A와 B를 상호 견제시켜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을 창출해 내는 것이다.
이 공간에서는 자율성이 증대돼 국익을 챙길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전략적 모호성’일까? ‘전략적 모호성’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만, 두 가지 치명적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첫째, 모호성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 모호성을 유지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위험성 때문에 자칫 A와 B로부터 동시에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중·소 분쟁 와중에 있던 북한의 1960년대 외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늘날 미·중 패권 경쟁 속에 있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중공업 위주의 경제 발전을 추진하면서 4대 군사노선에 따라 최신 군사장비를 확충하려고 했다. 소련은 북한의 중공업 분야 원조는 물론 최신 무기도 제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산 종주국이자 UN 상임이사국이어서 북한을 외교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중국은 소련에 비해 여러모로 낙후돼 있었다. 하지만 북한에 민간 생활에 요긴한 경공업 품목을 원조하고 있었고, 북한의 정치적 성향이 소련보다 중국에 더 가까웠다. 당시 소련은 미국에 평화공존을 제기하면서 스탈린 개인우상화를 비판하고 있었으나, 중국과 북한은 미국과 평화공존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스탈린 개인우상화 비판도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권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금기사항이었다.
그렇지만 북한은 소련과 중국 두 나라가 모두 필요했다. 어느 한 국가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때 북한이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택한 전략이 바로 ‘전략적 모호성’이었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특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위험 부담을 회피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전략이라기보다는 당면한 곤란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임기응변’에 가깝다. 다시 말하자면 ‘전략 없음’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소련에 가서는 후르시초프 서기장이 듣고자 하는 발언을 했다. 후르시초프는 그 대가로 김일성이 요구하는 원조를 약속했다. 중국 마오쩌둥 앞에서는 그가 원하는 바를 언급했고 이에 만족한 마오쩌둥은 곧바로 북한에 대량의 원조를 약속했다. 중국과 소련은 북한이 자국 편에 줄서기를 요구하며 소위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북한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필요한 것을 챙겼다.
이때의 북한 외교 형태를 등거리 외교 또는 시계추 외교라고 한다. 북한은 ‘전략적 모호성’으로 양측에서 많은 경제적 원조를 받아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외에도 북한은 1961년 7월 6일 소련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고 이어서 5일 후, 7월 11일에는 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미국을 의식해서 북한과 조약 체결을 계속 미루던 소련과 중국을 북한이 압박한 결과였다.
즉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상황’(The tail is wagging the dog)이 발생한 것이다. 약소국 생존론에 의하면 약소국은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을 때, 강대국에 대하여 외교적 자율의 공간이 넓어진다고 한다. 첫째는 대립하고 있는 두 강대국이 나를 중심으로 경쟁할 때, 둘째는 국내에서 한 목소리가 나올 때이다. 당시 북한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전략적 모호성’은 여기까지였다.
북한이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고 1962년부터 중국과 점차 가까워지자 소련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곧바로 제재를 가했다. 소련의 요구는 북한이 중국의 ‘인민공사’나 ‘대약진 운동’과 같은 대중동원 방식을 버리고 소련이 제창한 ‘동유럽공산국가 경제협력기구(COMECON)’ 분업체계에 합류하여 중공업이 아닌 경공업을 발전시키라는 것이었다.
소련은 우선 후르시초프가 북한에 약속한 중공업 경제 원조를 취소했다. 그리고 동구 공산권국가들에게 북한과 교역을 제한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 여파는 예상보다 컸다. 소련의 원조를 전제로 수립된 북한의 ‘7개년 인민경제발전계획(1961년~1967년)’은 차질을 빚었다. 중국이 제공하는 경공업 위주의 원조는 소련의 중공업 원조를 대체할 수 없었다.
북한은 큰 타격을 입고 경제발전 목표량을 하향 조정하면서 목표년도도 3년 연장했지만 달성할 수 없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경제적 원조가 절실했다. 1965년 무렵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북한이 중국과 소원해지면서 소련에 접근했다. 경제적 원인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은 북한이 우호관계 재개 신호를 보냄에 따라 취소했던 원조를 재개했다.
소련도 중국과 분쟁상황에서 북한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국이 가만있지 않았다. 중국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중국과 북한 대사를 소환하고 국경을 폐쇄하는 등 양국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중국이 약속했던 경제원조는 당연히 취소됐다. 당시 소련도 대외원조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상황이어서 소련의 원조만으로는 북한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국제정치에 공짜는 없다. ‘조금 주고 많이 챙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대해서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 ‘전략적 모호성’으로 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당연히 견제와 보복이 뒤따른다. 이 현상이 미·중 패권경쟁 시대인 2020년대와 중·소 분쟁 시대인 1960년대가 다르겠는가,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다르겠는가.
북한은 ’전략적 모호성‘의 한계를 깨달았다. 즉 모호한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언젠가는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리고 A쪽으로 쏠린다면 B의 견제는 불가피하고, B로 쏠린다면 이번에는 A의 보복을 감수해야 한다는 국제정치의 속성도 알기 시작했다. 이 속성은 공산주의 이념을 넘어서는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중국이나 소련, 어느 한쪽으로 편향돼서는 안 되겠다는 취지로 자주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그리고 외교의 대상을 중국과 소련을 넘어 제3세계 비동맹 국가로 넓혀나갔다.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런 북한의 정책 전환을 비판한다. 비동맹외교는 친구는 많이 사귈지 모르겠지만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친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당시 북한이 경제적 자립 즉 자력갱생보다는 자본과 기술을 갖춘 서구로 방향을 돌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전략적 모호성은 상황에 따라 필요하지만 그 한계도 잘 알아야 한다. 모호성의 유효기간은 짧아서 지속될 수 없고,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한계 말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