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1-20(월)
 


육대다부동1.png
▲ 6.25남침전쟁시에 1사단장으로 다부동지구전투에서 북한군을 성공적으로 저지시킨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이 작전토의하는 모습과 다부동지구전투 상황도[사진=전사편찬연구소]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선엽 장군은 상황판 지도에서의 설명을 잠시 멈추고 학생장교들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다부동 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0년 8월3일부터 9월22일까지 벌어졌던 대구 북방 다부동 전투는 유례없이 치열했다. 김일성의 북한군은 처음부터 다부동을 노렸다. 불과 22km 떨어진 대구를 바로 찌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김일성은 국군 1사단 정면에 무려 북한군 3개 사단 2만여명의 병력을 몰아넣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던1사단 병력은 모두 7000여명으로 병력은 3대 1, 화력은 10대 1로 북한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북한군 전쟁지도부는 바로 그 점을 노린 것이다.


북한군의 수암산, 유학산 선점에 당황, 또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 돌파 위기

 

8월12일 하달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5연대가 고수하고 있던 왜관 북쪽 6.5km지점부터 각연대를 5~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 장군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방어선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병력은 70%가 보충되어 90~100%정도를 유지했다. 뿐만 아니라 T-34전차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북한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 장군이 쓸데없이 철수경로를 통제했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다음편 계속)

 


태그

BEST 뉴스

전체댓글 0

  • 03482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직업군인 사용설명서(118)] 다부동지구 전투 전쟁영웅들의 현장 체험담 ⑥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