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중국 알기 (13)] 중국은 왜 북한의 ‘천년 숙적’이 되었을까?
필요할 땐 ‘혈맹’이지만 ‘불신’의 역사도 상당…중국이나 북한 모두 자기이익에 충실한 결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우리가 중국과 북한 관계를 볼 때 의아한 부분이 있다. 중국과 북한이 그들이 항상 강조하는 만큼 혈맹인가이다. 중국과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피로써 맺어진 혈맹, 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우의’ 등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중국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북한은 언제나 변함없는 혈맹이라기보다 필요할 때만 혈맹인 것이다. 특히 북한은 외양상 중국을 혈맹으로 치켜세우지만 내면적으로는 강하게 불신하고 있다. 북한의 중국에 대한 불신의 역사는 혈맹의 기간보다 짧지가 않다. 그러면 북한의 대중국 불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첫 번째는 김일성이 1934년 중국 만주지방에서 중국 공산당의 항일무장조직인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하여 항일빨지산 투쟁을 할 때였다. 당시 만주지방에는 항일독립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도 있었다. 일본관동군은 항일무장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이들 친일파를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이들 친일파 비밀조직을 ‘민생단(民生團)’이라고 했다.
항일무장단체는 조선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어떤 미심쩍은 행적이라도 있으면 민생단으로 간주해 처형했다. 이른바 민생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지속돼 약 5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희생을 당했다고 한다. 동북항일연군에 속한 김일성도 조사 대상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중국 중학교를 다녀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돼 처형을 면했다고 한다. 당시 20대 초반의 김일성은 중국인들이 아무 죄도 없는 조선인들을 민생단으로 몰아서 처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김일성은 이때부터 중국인을 어디까지 믿고 함께 해야 하는가 고민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6.25 전쟁 당시 얘기다. 중공군은 1950년 11월, 2차 전역에서 38선 부근까지 진출했다. 이때 펑더화이(彭德懷) 사령관은 부대정비와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더 이상 남진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펑더화이에게 “승리하는 군대가 공격을 멈추는 법이 어디 있는가, 계속 부산까지 밀고 가서 공산혁명을 완수하자”라고 항의했지만, 펑더화이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한 국군과 유엔군을 38선까지 밀어내 자국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동시에 멸망 직전의 김일성 정권을 살려주었고, 평양을 회복했으며, 북한 영역을 대부분 회복시켜준 것으로 참전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 것이다. 펑더화이에게는 한반도 공산혁명은 둘째 문제였다. 많은 희생을 치르며 완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펑더화이는 스탈린의 중재로 비로소 38선 이남으로 남진을 시작했다. 이 때 김일성은 중국의 본심을 깨달았다. 중국은 결코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인다는 지극히 단순한 원리를 깨달은 것이다. 김일성은 전쟁 기간과 전쟁 이후 중공군 사령부를 거의 방문하지 않았으며, 이 사건 이후 중국에 대한 불신이 굳어졌다고 한다.
세 번째로, 김일성은 1956년 8월, 중국 공산당과 유대가 있는 ‘연안파’와 더불어 일부 ‘소련파’를 숙청했다. 이른바 ‘8월 전원회의 사건’(또는 8월 종파사건)이다. 중국은 북한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당시 중국을 방문 중인 소련 부수상 미코얀과 함께 국방부장 펑더화이를 북한에 파견했다. 중소 합동 진상조사단인 셈이다.
중국과 소련은 숙청된 인원들의 복권과 김일성의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중국이 소련과 함께 북한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은 중국이 언제라도 내정간섭을 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네 번째로, 김일성 시대 말기인 1992년 북중 관계에 가장 극적인 한중 수교가 이뤄진다. 북한은 중국에게 “한국과 수교 필요성은 인정하나 우리가 미국 및 일본과 수교한 후 추진했으면 좋겠다”라고 제의했지만 중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기존 우호관계 유지를 약속했음에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배신감을 달래기는 역부족이었다.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는 1997년 2월 12일 조선로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황장엽이 중국 베이징 한국 영사관에 망명한 사건이 있었다. 북한은 선물을 사려고 외출한 황장엽을 남한 당국이 납치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의 요청을 거부하고 황장엽을 필리핀으로 보냈고 결국 한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은 믿을 수 없다는 평소의 생각을 굳히게 됐다.
김정은도 김일성, 김정일의 대중국 인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첫 사례가 고모부인 장성택을 ‘국가전복음모행위’라는 죄목으로 2013년 12월 12일 처형한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대외무역의 90% 이상을 하고 있는데, 장성택은 대외무역을 장해 점차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김정은은 장성택이 중국의 지원으로 정권 교체를 도모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느낀 것이다.
다음 사례는 이복형 김정남을 쿠알라룸프르 국제공항에서 살해한 것이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김정은은 중국이 김정남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다. 몇 차례 암살을 기도했지만 번번이 중국의 개입으로 무산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정은은 중국이 자신을 대체하여 김정남을 지원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마지막 사례는 UN 등 국제사회로부터 북한이 핵실험에 따른 경제제재를 받을 때 중국이 동참한 사실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을 원치 않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춘 것이다. 2017년 당시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못하나 건너오지 않고 있다’라고 할 정도로 중국은 철저히 북한을 제재했다.
김정은은 이런 중국을 향해 “미국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이어서 ‘조중 친선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목숨과 같은 핵과 맞바꾸면서까지 구걸할 우리가 아니라는 걸 똑똑히 알아야 한다’라고 반발했다. UN의 대북 경제제재에 동참하는 중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감과 불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시사점은 중국과 북한 관계는 앞으로도 과도하게 혈맹을 강조할 때도 있을 것이고, 최고 지도자의 특사 면담도 거절하는 냉랭한 시기도 있을 것이다. 개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북 관계의 특수성과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과 북한은 모두 자기의 이익에 충실하고 있다고 본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