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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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1사단장이었던 좌측박림항 장군(3공 시절 건설부장관)과 우측 2월 현충인물로 선정된 김동빈 장군 모습 [사진=국가보훈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혈전과 격전이 거듭된 노리고지의 산병호 속에는 쌓인 시체가 썩어 구더기들이 득실득실하여 발목까지 빠졌으며, 교통호 속에서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포격에 메워져 버린 흙더미에 치여 중공군을 껴안은 채 그대로 죽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지들은 피 흘린 보람도 없이 휴전 직전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한 발악적인 맹공격을 받고 빼앗겨 지금은 대부분이 군사분계선(MDL) 이북에 들어가 있다.


4개월 동안의 노리고지 두더지 생활로 ‘털보’라는 별명얻은 도상보 소위

 

12연대 3중대 1소대장 도상보 소위는 11연대의 격전이 끝난 후인 ‘52년 12월13일, 노리고지 방어에 투입됐다. 11월14일에는 한국 전선을 시찰중인 닉슨 미 부통령이 1사단 12연대를 방문하여 격려도 했다.

 

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는 미군 포와 탱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당시 우리 한국군과 미군은 화력지원 협조본부(FSCC)를 설치해 놓고 보전포 협동 작전을 긴밀히 조정했다.

 

당시 유엔 공군은 피아식별을 위해 대공포판이 있는 곳은 회피하여 폭격을 가했다. 그래서 12연대가 확보하고 있던 소노리 고지에는 밤이 되면 대노리 고지의 중공군들이 내려와 호 속에서 손목에 끈으로 잡아매고 있던 국군 병사들의 대공포판을 뺏으려고 해 서로 끌어 잡아당기며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 두 고지는 이렇게 인접해 있어 강 이남에 주력을 둔 아군으로서는 적의 야간 공격 때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미군 측에서는 이곳을 포기하고 강 남쪽으로 철수하자고 주장도 했다.

 

그러나 박림항 1사단장은 이 같은 의견이 제기되자 소노리 고지는 우리가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사수하겠다면서 적극 반대했다. 1사단 좌우에는 영 연방군과 미 7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12월 중순 즈음에 도상보 소위는 12연대장 정영흥 대령의 “도 소위 소대가 투입해 소노리 고지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때부터 4개월 동안을 이 소노리 고지에서 두더지 생활을 했다. 고지에 도착해보니 호들이 거의 다 포격에 무너져 버린 상태였다.

 

막힌 교통호를 파다가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중공군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죽어 있는 시체를 몇 구 발견했고, 간혹 남아 있는 호 속에는 구더기들이 꽉 차 있어 발을 넣을 수도 없었다.

 

밤중에 순찰을 나가 졸고 있는 듯한 동초병을 깨워 보면 어느 사이에 적 총탄을 맞고 죽어 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공격해오는 적들이 아군 진지에 달라붙어서 진내 사격을 요청하고 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위생병이 없어졌다.

 

그때 건너편 골짜기에서 그 위생병이 중공군한테 끌려가면서 “소대장님. 소대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데 정말 못 견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무차별 사격을 시켰다.

 

사격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봤더니 부르는 소리가 들릴 듯 말듯 하더니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위생병은 휴전협정후에 포로 교환 때 송환돼 왔다.

 

도상보 소위가 ‘53년3월 하순에 이 소노리 고지에서의 임무를 교대하고 철수했는데, 수염이 둘째 단추까지 내려와 ‘털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수염을 깎고 나니까 소대원들도 전혀 몰라보았다고 한다. 그는 소노리 고지 방어의 전공으로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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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1)]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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