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7(수)
 


20200221331411.png
▲ 좌측 파로호와 사로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후송을 기다리는 모습, 우측 당시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으로 참전해 적군 3만명을 수장시킨 파로호 전투의 산 증인 김달육씨가 화천댐 탈환을 기념하는 ‘전공비’를 바라보는 모습[사진=전사편찬연구원/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옛날이나 지금이나 병법의 기본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빠르게 싸우고 빠르게 끝내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작전편’에 ‘병귀승 불귀구 구즉둔병좌예 졸속 미도교지구(兵貴勝 不貴久 久則鈍兵挫銳 拙速 未睹巧之久)’란 구절이 나온다. 


이는 “전쟁할 때 신속하게 이기는 것이 중요하며 오래 싸우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전쟁이 길어지면 창끝이 무뎌지고 전투 의지는 약해진다. 준비가 조금 부족해도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뜻으로 속전속결(速戰速決)을 강조한 말이다.


용문산 전투 압승에 이어 신속히 반격하자 중공군은 휴전회담 제의


1951년 5월21일 ‘용문산 대첩’에서 압승한 국군 6사단은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60여 km를 진격했다.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그때 마침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화천댐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지상 목표였으며 북한군으로서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패퇴하던 중공군은 화천(대붕)호에 이르렀을 때 호수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화천발전소 탈환전'이라 이름 붙여진 파로호 전투를 3일간 밤낮없이 치렀다. 


그 결과 위의 사진처럼 중공군 3만여명을 '물 반 고기 반'이던 화천호에 `물 반 시체 반'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둬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대승의 현장이었던 ‘화천(대붕)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 전투와 현리 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졌던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닷새간의 전투 결과 국군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이에 비해 중공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어 3개 사단이 궤멸되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공군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한 용문산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퇴각하는 중공군을 쫓아 30일까지 반격작전을 전개한 국군과 UN군은 파로호 전투 등에서 대승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중공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자 결국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다음편 계속)


1-8.png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태그

BEST 뉴스

전체댓글 1

  • 21910
유호성

파로호라고 쓴 이승만 전 대통렴 친필 휘호 비석이 어딘가로 옮겨 졌다고 하던데...
옛날 산에 올랐다 귀가길에 일부러 둘러 보고는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포철을 세운 박태준 대령이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는데....

댓글댓글 (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희철의 전쟁사(11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 체결’ ①'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