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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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6차공세인 5월공세(’51, 5.16~22 ) 이후, ‘철의 삼각지’를 지향한 유엔군의 북진 상황도 [자료=육사 한국전쟁사 부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 6차 공세를 사투로 막아낸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함에 따라 중공군은 병법의 기본인 속전속결(速戰速決)원칙을 포기하고 신속한 승리보다는 천천히 승리를 쟁취한다는 전략으로 변경하였고, 휴전협정에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미국 또한 한반도의 정책 목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전선을 유지하면서 휴전을 모색하고 휴전 이후 유엔을 통한 한반도의 통일국가 수립을 최종적으로 추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은 스스로 외교적 주도권을 행사하여 소련 및 중국정부와 막후 접촉을 시작했다. 유엔군이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에서 압승함에 따라 중공군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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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휴전회담 본회의 첫 날의 모습[사진=전사편찬연구원/연합뉴스]

 

휴전까지 지루하고 치열한 ‘고지 쟁탈전’과 포로 교환 등 휴전회담 신경전 지속


6.25남침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만인 1951년 6월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인 야코브 말리크가 라디오 방송에서 '평화의 대가'란 연설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했다. 말리크는 휴전회담 개최와 양군의 38도선으로부터 철수도 제의했다. 


공식적으로 나온 첫 제의였지만, 이러한 식의 휴전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꽤나 나돌고 있었다. 말리크가 휴전협상을 제안하자 미국은 이에 일단 동의하였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유엔군이 강력한 공세로 전환하자 계속된 패배로 전세가 불리해져 전투력 복원에 시간이 필요했던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요구로 개성에서 1차 예비회담이 열려 본회담을 위한 준비사항을 협의했다. 


드디어 7월10일 첫 본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양측간의 신경전속에 아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당시 유엔군측에서는 회담이 한 달 정도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치적 선전에 급급한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파행적 진행으로 7월26일에야 토의할 의제를 가까스로 합의했다.


그러나 첫 휴전회담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측은 15일간의 고의적 지연을 통해 그 동안 형편없이 붕괴된 군사력을 재편했다.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이 전투력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고 유리한 지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헌데 문제는 휴전회담의 장소가 개성이므로 서부전선에서의 전면적인 공세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중공군과 인민군측도 반격할 경우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을 감안하여 주 전장을 중동부전선의 산악지역으로 집중했다.


따라서 휴전이 되는 1953년까지 2년간 ‘고착된 전선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쟁이 전환됐다. 


유엔군과 중공군 및 인민군은 이렇게 고착된 전선에서 혈전에서 혈전으로 이어진 소모전을 감행한 ‘수도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전투’ 등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을 지루하게 지속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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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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