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4(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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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월 2일 소련을 방문 중인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 [사진=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 현대사는 공산혁명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으며, 공산혁명은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을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마오는 신중국 건국을 선포한 1949년 10월 1일 이후 제일 먼저 스탈린과 담판을 시도했다. 그래서 마오는 1949년 12월 6일 출발하여 1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래 해를 넘겨 1950년 2월 17일까지 두 달 정도 소련에 체류했다. 정상회담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간 회의였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축출하고 나서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해군력을 보강하여 대만까지 해방시키는 것이고, 국가로서 틀을 잡아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며, 외교적으로 장제스가 스탈린에게 만주의 이권과 몽골 및 신강 등의 주권 문제에서 대폭 양보한 ‘중·소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새롭게 ‘新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946년부터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기위해 방문을 희망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스탈린은 1945년 8월 14일 장제스와 ‘소련은 국민당을 지원하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는다’라는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이야기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합국인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는 독일 패망 후 유럽 처리와 일본과의 전쟁을 놓고 회담을 한다. 일종의 전승국 간 전리품 ‘주고받기’ 거래인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독일을 분단하고 동유럽에서 소련의 기득권을 인정하는데 합의한다. 그리고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패망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예상되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요구한다. 이 때, 스탈린은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루즈벨트가 “너희가 원하는 것이 뭐지”라고 묻자, 스탈린은 “만주 지방에서 러일전쟁 이전 구러시아 제국이 누렸던 이권을 보장해 달라”고 속마음을 드러낸다.

 

이 제안에 대해 루즈벨트는 쾌히 승낙하면서 “이 문제는 중국과 협의해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미국과 합의를 바탕으로 스탈린은 장제스로부터 만주지역의 이권을 보장받는 대신 공산당을 지원하지 않겠다는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국민당을 지원한다고 약속했던 스탈린이기에 마오쩌둥 만나기를 꺼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전역을 공산화시킨 마오쩌둥이 자신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로 오겠다는데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자 소련은 마오쩌둥의 격을 낮춰 많은 공산권 국가의 축하사절단 중 하나로 대우했다. 소련은 장제스로부터 보장받은 만주 및 몽골의 이권이 조금이라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과는 반대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되찾고 경제와 군사원조까지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스탈린에게 지원받은 것이 없었다. 스탈린은 국민당을 지원했고, 공산당군이 양쯔강을 넘어 진격하려 할 때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구실로 도하를 만류했다. 중국을 분단시키려는 의도였다. 소련과 중국은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국가이익이 더 중요했다. 당시 중국이 소련에 굽히고 들어간 것은 국력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1차 회담 후, 마오를 모스크바 외곽의 어느 한적한 지역에 머물게 하고 오랫동안 관찰했다. 마오도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안하고 먹고 싸고 자기만 한다”라며 원색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마오는 담판을 짓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빼들었다. 그는 스탈린을 향해 “영국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다. 우리도 영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국도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반도와 대만을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시키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다. 미국은 중국을 위협할 의도가 없다는 호의적인 신호를 보낸 것이다. 스탈린은 고민이 깊어졌다. 마오가 소련을 떠나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손잡으면 어떻게 하나,  공산권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유고의 티토처럼 독자노선을 걸으면 어떻게 하나... 등 모두가 소련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들이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다독이기 위해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장제스와 맺은 ‘중소 우호조약’을 파기하고 1950년 2월 14일 ‘新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한다. 만주 지방의 철도, 다롄·뤼순항의 운영권은 중국에 무상 반환했다. 하지만 외몽골 독립은 양보하지 않아 마오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중국은 1950년 4월 중앙인민정부위원회 회의를 소집해 마오의 외교성과를 치하하며 ‘新중·소 우호조약’을 승인했다. 당시 마오는 외몽골을 잃은 것 때문에 조약 승인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마오와 회담 후, 공산주의자이기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보고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 스탈린의 머리를 스친 것은 1949년 3월 김일성이 요구한 남조선 무력 적화통일 승인이었다. 그는 당시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만 김일성이 남침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중국도 개입해 싸움붙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마오도 억제할 수 있고, 미국도 한반도에 묶어 놓아 유럽에서 압력이 분산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은 6.25 전쟁이라는 함정을 파서 중국과 미국을 끌어들이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마오가 소련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1950년 1월 30일 경 김일성에게 무력 남침 승인의 신호를 보낸다. “무력 남침문제에 대해 상의할 사항이 있으니 소련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소련 방문을 마친 후, 1950년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으로부터 ‘무력 남침 조건부 승인’을 받는다. 소련이 내건 조건은 ‘중국이 동의할 경우’였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귀국 후 바로 4월에 마오를 만나 중국이 동의하면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스탈린의 결심을 통보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제안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스탈린의 뜻에 이의를 제기해 관계가 악화되면 당시 소련에 의지하고 있던 군사 및 경제원조는 받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마오쩌둥은 원하지 않은 김일성의 무력남침에 동의했다. 이렇게 6.25 전쟁 발발 이면에는 스탈린의 노림수가 존재하고 있었다.

 

임방순 인천대 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김한경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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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18)] 마오쩌뚱, 신중국 건국 선포 후 스탈린과 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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