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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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소에 잡혀있는 북한 및 중공군 포로들 모습[사진=전사편찬연구원/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은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정치적 선전에만 급급한 신경전이 전개되는 답답한 양상이었다. 그러던 중, 1951년 12월18일에 최초로 포로 교환 협상을 위해 포로 명단을 교환했다.


이때 공산측 포로는 북한군 11만2000명과 중공군 2만명으로 도합 13만 2000명이었고, 반면에 연합군은 미군 3200명, 남한군 7000명, 유엔군 1600명으로 총 1만1800명이었다.


당시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다. 이에 따라 포로 교환 원칙에 대해 이견이 생기고 상호 갈등도 심화되며 회담도 장기화 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측은 포로 전원의 본국 송환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유엔군과 국군은 포로들의 1대1 교환과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강조했다. 


특히 남한은 북한군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가 남한에서 강제로 징집당해 북한군으로 끌려갔다고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석방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가 매우 컸던 것은 1950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급속한 유엔군의 북진과정에서 11만명이 넘는 많은 수의 북한군들이 패잔병이 되어 포로로 잡혔고, 반대로 중공군 개입후 1·4후퇴과정에서 1만명에 이르는 유엔군이 북한군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에게 붙잡힌 포로들은 거제도에 수용되여 미군이 관리했으나, 말이 잘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한국군에게 수용소의 통제와 감독을 맡겼다. 그러나 포로 숫자가 많아지면서 수용소 내에 다양한 조직이 생겨났고 이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장 심했는데, 특히 포로 교환이 논의되면서 다툼은 더욱 격해졌다.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한 포로들은 남한에 남으려는 반공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미군은 1952년에 포로 심사 과정 중 반공포로들 가운데 일부를 민간인으로 구분하여 석방하려고 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별적인 의사 확인을 방해하면서 전원 북송을 주장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미군은 정신 교육을 통해 포로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하도록 유도했다. 각 종교 단체들도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목사들이 가장 적극적이어서 수용소 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겼다. 


후에 이 기독교인들은 반공포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남한에서 억지로 끌려갔다가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북한 체제에 실망하여 남한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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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프로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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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19)]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⑥양측의 포로 숫자 차이로 포로교환 이견 상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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