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대선 승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큰 노력을 했던 것은 다름아닌 북진통일이었지만, 당시의 미국이나 공산권 모두 전쟁 지속보다는 협상의 길을 모색하려는 상황에서 자신의 핵심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엔 참전국들은 자국 군대가 큰 희생을 치르지 않도록 하면서도 패배를 당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전진도 후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선을 유지시키고만 있었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이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을 이용해 겉으로는 북진통일을 고집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선택한 것 중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휴전후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이었다.
그러던 중 1952년 말 유엔총회는 인도 주도하에 이루어진 장기간의 토의 끝에 12월3일 54:5의 표결로 남북한 양측에 억류되어 있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단에 넘길 것을 규정한 인도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결의안을 채택한 12월3일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전쟁 조기 종결’ 공약을 강도 높게 주장했던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방한한 날이기도 했다.
■ 이승만 대통령, 판문점 협상에서 반공포로들의 강제송환 결정에 대노
다음해인 1953년 2월2일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한달 뒤인 3월3일에는 6.25남침전쟁을 사주해 동족상잔 비극의 원흉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했다. 전쟁의 주모자가 사라진 것은 전쟁의 조기 종결 가능성을 높힐 수 밖에 없었다.
소련 정부는 3월19일 중국과 북한에 “전쟁의 종결은 세계 각국은 물론 중국과 북한 인민의 이해에도 부합될 것이다”라고 통보하며 가급적 빨리 전쟁을 끝냈으면 좋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
이어 4월20일부터 1주일 간 유엔 측은 5,800명, 공산측은 684명의 부상병 포로를 각기 송환했고, 이것이 끝나면서 4월26일 전쟁의 단계적인 축소를 위한 움직임 속에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재개되었고, 양측 모두 합의에 도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포로 송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문제는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반공포로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이들을 억지로 송환하는 것은 인도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유엔군은 '자발적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유엔군은 이를 통해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선점하려고 했다.포로의 숫자도 문제였다.
유엔군은 공산군 포로 13만 2,474명의 숫자를 제시했으나, 공산 측은 한국군 7,142명과 유엔군 4,417명을 합쳐 고작 1만 1,559명의 포로 숫자를 제시했다.휴전협상 초기에 공산측이 자랑하며 제시했던 인원과는 달리 5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공산 측도 유엔군의 포로 명단에서 남한 출신 의용군 등 민간인 억류자 4만 명이 빠진 것을 문제삼았다.
결국 회담은 난항을 겪다가 1953년 6월4일 판문점 협상에서 1952년 말 유엔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포함된 방식을 근거로 모든 전쟁 포로의 교환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였다.
한국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인도의 장성에게 그 책임을 맡기도록 하였다. 즉 송환을 반대하는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본인 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첫째, 양측은 송환을 원하는 모든 포로를 두 달 안에 송환한다. 둘째,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를 보호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안에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설치하고 위원단과 포로를 인도군이 수비한다. 셋째, 송환 거부 포로에 대해 90일 간 본국 파견원이 설득하도록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송환 협정에 관한 내용을 보고받고 대노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송환된 소련군 병사들을 스탈린이 모두 숙청한 일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귀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들을 억지로 돌려보낼 경우 그들이 희생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반공포로들을 관리할 중립국 인도가 친북한인 것도 큰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6월8일 포로 교환 협정이 체결되었고, 반공포로들은 중립국감시위원단과 인도군 수비대에 넘겨질 운명이 되었다.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 문제가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포로의 강제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를 놓고 휴전회담이 2년을 끌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게 되면 휴전회담이 무효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휴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큰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