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철의 전쟁사(12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⑪헌병 보호하에 3만여명의 반공포로 대탈주 감행
휴전협정을 체결하려거든 먼저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할 것을 요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은 이미 1953년 6월6일 미국에 휴전협정을 체결하려거든 먼저 한국과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당시에 미국같은 초강대국에 한국같은 신생독립국이 먼저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하는 것은 통상적인 외교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여기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도박같은 초강수를 두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관할에서 벗어나 있는 헌병사령관 원용덕을 불러 반공포로를 석방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이것은 우리가 원치 않는 휴전협정을 언제라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승만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엄청난 도박 감행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는 1953년 6월18일 새벽 1~2시경 북한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돼 있는 부산, 대구, 광주, 마산, 영천, 논산, 부평 등의 7개 포로수용소 하늘에 예광탄이 발사되었다.
동시에 3만5457명의 반공포로들이 우리 헌병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대탈주를 감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1시 미국을 상대로 이번 조치가 자신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것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덕분에 2만6930명이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미군이 감시하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경비병의 발포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다쳤다. 탈주한 반공포로중 8293명은 탈출에 실패해 다시 철조망에 갇혔다. 이들은 중립지대 인도군 수용소로 옮겨져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거쳤으나 대부분 석방됐다.
미국은 물론 세계는 이승만의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국의 충격은 정말 컸다.
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즉각 반공포로 석방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브리그스 주한 미대사는 대통령에게 항의하면서 손으로 책상을 치기도 했다. 면도를 하고 있던 영국의 처칠 총리는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면도기를 손에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해 포로들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포로들의 옷을 갈아입히고 집에 숨긴 채 숙식을 제공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미국이 가장 놀란 것은 이승만이 1950년 7월 이후 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이양하도록 한 양국의 합의 위반을 넘어, 이를 무시하고 포로들을 석방했기 때문이다.
더욱 큰 문제는 휴전협상을 앞두고 한미 관계에는 균열의 징후가 보였다는 점이다.
클라크 장군이 지휘하는 미 극동군사령부 겸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가 휴전에 반대해 한국군이 유엔군 지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지휘할 경우에 대비한 비밀계획까지 수립했다.
일명 에버레디(Everready)계획이라고 불린 이 계획은 1953년 5월22일 작성되어 워싱턴에 보내졌다. 이 계획에는 필요한 경우 유엔의 이름으로 군정을 실시하거나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철수까지 포함한 아주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미국 정부는 한때 쿠데타를 사주해 이승만을 실각시키는 방안까지 검토했으나 국군의 충성심이 높고 마땅한 대안이 없어 접어버렸다.
결국 이승만이 북진통일 주장을 접고 휴전협상에 찬 물을 끼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은 한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선에서 갈등을 무마했다.
정말 이승만 대통령은 항간의 소문대로 '내치는 등신, 외교는 귀재'라는 말이 실감난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