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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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들고 나오고 있는 모습 [사진=정부기록보존소/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공포로 석방에 놀란 아이젠하워는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대통령 특사로 한국에 급파했다. 


로버트슨 특사는 “한국은 많은 유엔군 병력의 생명과 피의 대가로 확보하려는 휴전을 방해할 권리가 없다”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의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에 이승만은 과거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두 번씩이나 배반을 당했는데(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했을 때와 1945년 한국이 분단되었을 때), 현재의 상황은 또 하나의 배반을 의미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런 미국에 협력하느니 차라리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하였다.


특사로 한국에 급파되어 이승만과 단판을 벌였던 로버트슨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이승만은 빈틈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로 몰고 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며,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이지만,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와 불굴의 정신은 지원되어야 마땅하다”고 보고서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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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포로석방 직후 한국에 급파되어 단판을 벌였던 로버트슨 미국특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는 장면 (사진=정부기록보존소)

 

반공포로 석방으로 협상에서 미국에 힘을 실어주며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체결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단독으로는 북진통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모르고 북진통일론을 주장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런 점은 서울에 찾아 온 닉슨과의 대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승만은 닉슨에게 “나는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이 대통령은 이어서 닉슨에게 “내가 한국이 단독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미국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우리가 함께 가면 모두를 얻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


훗날 닉슨은 자신의 회고록에 “나는 이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 불가능성(being unpredictable)’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 데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외교에 능수능란했던 이승만, 또 공산주의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상대편에게 심어줌으로써 공산세력과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힘을 실어주었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미국은 유리한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편은 무언가에 쫓기듯 위축된 입장에서 협상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로버트슨과의 2주간의 치열한 협상 끝에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다음과 같은 안건들을 제안하고 동의했다. 


“1. 정전 후 한미 양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 장기적인 경제원조를 제공하며 1단계로 2억 달러를 제공한다.(1954년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은 2400만 달러였다) 

 3. 미국은 한국군의 20개 사단과 해공군력을 증강시킨다. 

 4. 양국은 휴전회담에 있어 90일이 경과되어도 정치회담에 성과가 없을 경우 이 회담에서 탈퇴하여 별도의 대책을 강구한다. 

 5. 한미 양국은 정치회담을 개최하기 이전에 공동목적에 관하여 양국의 고위회담을 개최한다.”


휴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런 조건들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협정 조인 후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싸워서 이기기보다 평화를 얻는 게 더 어려웠고, 적군보다 이승만 대통령이 더 힘들었다.” 이로써 1953년 7월 27일, 3년 넘게 진행됐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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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 8월3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서울로 왔던 덜레스 국무장관 모습 (사진=정부기록보존소)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전쟁 없이 경제강국 기반 만든 이승만 대통령은 진정한 리더


1953년 8월 3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울로 왔고,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했다. 덜레스는 가조인 후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끔을 포기하는 대가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미국의 자동 개입을 보장받고, 70만 대군을 보유하는 아시아의 군사강국으로 부상하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1953년 10월1일 변영태와 덜레스가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공식 조인했으며, 1954년 1월15일 한국 국회가, 1월26일 미국 상원이 비준함으로써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우리에게 그 값을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북아에서 70여 년 간 전쟁이 없이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는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던 이승만의 심모원려 덕분에 대한민국의 오늘이 가능했다며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한미동맹으로 인해 동북아에서는 70여년 간 전쟁이 사라졌다. 그동안 동북아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남침전쟁 등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53년 한미동맹으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장기적인 평화가 이루어졌다. 장기적인 평화 덕분에 제일 먼저 일본이 경제발전을 이루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일어섰고, 이어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으며,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국으로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최근 들어 전개된 동북아의 눈부신 성장은 70여년 전 휴전으로 미봉한 채 한반도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발목을 붙잡아 한국에 주둔케 한 이승만의 심모원려(深謀遠慮) 덕분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한국인들의 진정한 리더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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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 프로필▶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 육군대학 교수부장(2009년 준장)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년),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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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2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⑫ 미국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와의 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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