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7(수)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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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중공군 수만 명을 격파해 수장한 파로호 전투는 '현대판 살수대첩'이라고 불린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현장을 방문해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라는 휘호를 내렸다. [사진=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는 60년대에 초등학교 다닐 때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 오랑캐 ~ ♬” 라는 전시 동요를 자주 들었다. 그 때부터 중공군은 오랑캐 군대이고 인해전술을 주로 사용하는 형편없는 군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사를 연구하면서 중공군은 그런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웠다.

 

6.25 당시 중공군이 어떠했는지 그들이 수행한 5차례의 전역을 통해 알아보겠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평안남도 영원-덕천 일대에서 방어를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유엔군과 한국군의 진출 속도가 너무 빨라 중공군이 설정한 방어선 도달 전에 통과할 것으로 보고 계획을 변경해 공격으로 전환했다.

 

1차 전역인 이 공격작전은 유엔군과 한국군을 청천강 너머 적유령 산맥 앞에서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중공군은 공격을 멈추고 적유령 산맥 일대에서 웅크리고 유엔군과 한국군이 계속 도로를 통해 북진하기를 기다렸다. 덫을 놓고 걸려들기만 기다리는 매복의 형국이었다. 또 1차 전역에서 생포한 포로를 풀어주면서 중공군은 소규모로 곧 철수할 것이라는 허위 정보까지 유포하는 미끼도 던졌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교전이 있었지만 소규모의 중공군이 참전한 것으로 판단하여 계속 북진을 결심한다.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가겠다는 성급한 마음이 냉정함을 가렸기 때문이다. 곧이어 중공군은 매복에 걸린 유엔군과 한국군을 유린하였고, 이것이 2차 전역이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평양을 내주고 38선 부근까지 철수했다. 

 

중공군이 1, 2차 전역에서 보여준 전투력은 유엔군을 긴장시켰다. 첫째, 야간 이동능력이다. 중공군 제1진 약 25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만 산길로 이동해 전선에 투입됐다. 이런 대규모 병력이 일주일 정도 노출되지 않고 이동한 것은 전사에도 드문 일이다. 

 

둘째, 심리전이다, 중공군은 깊은 밤 무당 굿판 같이 꽹과리치고 피리불며 나타나는 등 귀기어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생소한 전투방식에 유엔군은 초기에 공포감으로 전의를 상실했다. 주민 선무에도 능해 중공군은 가급적 민가에서 숙영하지 않았다. 또한 서울 점령 시 환영인파 없이 적막한 거리를 보고 “너희들이 어떻게 하여 서울 시민들이 다 남쪽으로 내려갔나. 이게 해방인가”라며 북한군을 질책했다고 한다.

 

셋째, 자신들의 장점인 우회기동, 매복, 포위, 측후방 차단 등의 유격전법을 사용했다. 당시 중공군 부사령원 홍쉐쯔(洪學智)는 항미원조전쟁회억(抗美援朝戰爭回憶, 1991년)이라는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중국이 본 한국전쟁(홍인표 역)’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됐다. 이 책속에 미군 중대장 5명이 중공군의 전술과 전투력에 관해서 홍 부사령원과 나눈 대화가 나온다.

 

원문을 인용하면, 홍 부사령원이 먼저 “중공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허심탄회하게 말씀 좀 해보시오”하자, 어느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당신들 전술은 대단합니다. 나는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지만 우리 작전은 포병화력 공격부터 시작해 비행기가 대량 폭격을 퍼부은 뒤 보병이 나중에 갑니다. 그런데 반해 중공군은 바로 우리 등 뒤로 접근해 배후를 강타하지 않습니까. 이런 전투는 처음 겪어봅니다.”

 

홍 부사령원은 “당신네들 전투는 밀어붙이는 것이고 우리는 지형을 이용해서 분할, 우회, 포위로 이루어지는 거죠.” 다른 중대장이 거들었다. “중공군의 그와 같은 전법은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네들 병사들은 용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중대 및 대대 단위로 움직이지요. 중공군은 어떻게 3~5명씩 작전을 벌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옆의 중대장이 말을 이었다. “중공군들은 독립작전에 능합니다. 각개전투 능력은 우리가 당신들보다 못합니다.” 또 다른 중대장이 말했다. “전투는 낮에 하고 밤에는 쉬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밤에 공격해 오니 우리는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형편입니다.” 홍 부사령원이 결론을 내린다. “무슨 방법을 쓰든 아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당신네들을 이길 수만 있으면 좋다는 생각이오.”

 

중공군은 1930년대부터 20여 년간 국공내전과 항일전을 거치며 단련된 백전노병들로서 매복, 야간기습, 우회기동, 측후방 차단, 포위 등 유격전의 대가들이다. 중공군은 3차 전역을 전개해서 1950년 1월 서울을 점령했고 북위 37도선까지 진출했지만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남한강-횡성-강릉선까지 북진한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반격에 대한 대응으로 4차 공세를 펼쳤지만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함으로 한계를 노출했다. 유엔군은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중공군을 몰아부처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일대를 회복했다. 이후 중공군은 5차 전역을 펼쳤지만 일시적인 성공에 그쳤고, 1951년 6월 말부터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38선 일대에서 고지전으로 전환됐다.

 

유광종의 저서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에는 중공군에 대한 백 장군의 증언이 실려 있다. “중공군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싸움의 때를 가려 나설 줄 알았고, 적절한 시점을 선택해 물러설 줄도 알았다. 약한 상대를 고를 줄 알았고, 강한 상대를 피할 줄 알았으며,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골라 사정없이 때릴 줄 알았다. 화력이 강한 미군에게는 은폐와 엄호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고 전투력이 약한 국군에게는 사나운 맹수가 달려들 듯 덮쳤다.”

 

한국군을 덮친 대표적 사례가 5차 전역이 벌어진 1951년 5월 중순 현리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 의해 오마치 고개라는 보급로가 차단당하자 조직적인 작전활동을 포기하고 중장비를 파기한 뒤 분산하여 1400고지 방태산 등을 넘어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산을 넘어왔지만 이곳에는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중공군에게 등을 보이며 1600고지 계방산 일대를 넘어가야 했다. 이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됐다.

 

그렇지만 한국군이 중공군을 격멸시킨 빛나는 승리도 있었다. 중공군 5차 전역에서 우리 6사단이 용문산에서 중공군 1개 군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화천 북방까지 추격하여 격멸시킨 파로호 전투이다. 파로호는 화천댐으로 생긴 인공호수인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승을 기념하여 ‘중공 오랑캐를 격파했다’는 의미로 파로호(破虜湖)로 바꾸었다. 주민들은 파로호의 물고기를 중공군 시신을 먹고 자랐다는 거부감 때문에 10년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패배의 교훈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승리의 기억을 왜곡시켜서도 안 된다. 승리의 기억은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원천이다. 용문산과 파로호에서 중공군을 격멸시켰던 우리 앞 세대의 강한 의지를 오늘날에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는 과거의 중공군이 아니라 새로운 상대 즉 ‘중국의 영향력’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임방순 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김한경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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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26)] 6·25전쟁 당시 중공군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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