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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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백범 김구선생이 38선 경계표식에서 찍은 사진으로 좌측이 비서인 선우진, 우측이 김구 선생이 매우 아꼈던 차남인 김신으로, 일찍 죽은 형 김인을 대신해 아버지를 도와 여러 일을 수행했으며 해방 후에 아버지 따라 북한을 방문할 당시와 훗날 공군총장(예비역 중장, 향년 94세였던 2016년 5월에 숙환으로 별세) 시절의 모습.[사진=국가보훈처/공군본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범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시절에 이미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우선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버지 혜안의 영향을 받은 차남 김신은 1937년 일본 공군이 중국 난징을 폭격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공군 조종사가 돼 조국 독립에 기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인 김구 주석과 함께 활동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간의 비밀연락 임무 등을 수행하면서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은 1944년 중국 공군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47년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하며 조종사의 꿈을 이뤘다. 귀국 이후엔 육군항공대에서 활동하며 1949년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탓으로 미군이 작성한 대한민국 공군 주요인물 출신성분 보고서에는 그가 미군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6·25남침전쟁 때 한국 공군으로 첫 출격한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중령

 

아버지인 김구 선생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김신은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20대 후반의 나이에 우익으로 진로를 확정하고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가 됐다.

 

비록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한 뒤에도 조모의 유골 송환 등으로 인하여 시기가 맞지 않아 공군 창설의 7인에는 들지 못했으나 귀국과 동시에 입대하면서 군사 교육 및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공군 창설 7인이 주도한 모임에는 계속 참여를 했는데, 당시 한국 공군에선 최연장자였던 최용덕 장군, 항공사령관 이영무 대령 등과 함께 중국 공군 출신으로 그들은 대한민국 공군 발전의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조선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의해서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 10인의 요원으로 선발된다. 당시그는 중국군-미군 유학과정에서 무스탕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 공군내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 직후 도일하여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하러 갔을 때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에서 공부했던 무스탕 메뉴얼을 지참해가서 자료를 제공함과 동시에 통역도 겸했다고 한다.

 

그는 공군 조종사로 6·25 남침전쟁 초기에 북한군과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전방에 나서지 않고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것을 소외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백범의 아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다가 생포될 경우 벌어질 정치적문제를 생각한다면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게 나은 일로여겼을 수도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군 전투조종사로 공중전에도 참가했다. 영화 ‘빨간마후라’도 사실 김신 장군이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승만 대통령입장에서 볼 때도 김 장군은 정치관이확고해흠잡을 구석이 없는 반공주의자이고, 기술관료의 자질도 충분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공군총장까지 역임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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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4)]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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