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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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26일 미 공군으로부터 F-51 전투기 10대를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조종사들이 미군 교관으로부터 조종 교육 등을 받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신 중령(전 공군참모총장), 다섯번째와 우측 사진이 故 이근석 대령으로 우리 공군의 최초 출격시 산화해 전투기 조종사 중 첫 전사자이다. 공군은 2008년 7월3일, 전투기 첫 출격을 기념해 이날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했다.[사진=공군본부/보훈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에 전투기가 한 대도 없던 우리 공군은 미군이 제공하는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인수하기 위해서 고(故) 이근석 대령을 포함한 10명의 인수요원을 선발했다.


김신 중령은 6·25 남침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이근석 대령의 인솔하에장성환 중령(전 공군참모총장), 김영환 중령, 강호륜 대위, 박희동 대위, 김성룡 중위, 정영진 대위, 이상수 중위, 장동출 중위 등 선발된 인수요원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김신 중령은 일본에서 인수받은 F-51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해 귀국한 다음날인 7월 3일 우리 공군의 최초 출격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백범의 아들이기 보다는 전투기 조종 실력이나 전쟁시 공적으로 평가받는 걸 더 선호했다고 한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은 것은 군인으로서의 당연한 자존심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첫 비행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단장이었던 이근석 대령은 안타깝게도 적의 대공포를 맞았다. 그는대공포에 엔진이 명중되자 탈출하기는 커녕 적군 전차부대 한 복판으로 돌진해서 비행기와 함께 산화했다.

 

이때 이 대령은 “3번기 왼쪽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이같은 희생적 공격을 함으로써 전투기 조종사 중 첫 전사자로 기록됐다. 이근석 대령은 나중에태극무공훈장 수훈과 함께 장군으로 추서됐으며, 공군은 58년이 지난 2008년에야 전투기 첫 출격을 기념해 7월3일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했다.

 

한편, 비행한지 몇 일만에 최고참 이근석 장군의 전사로 한국공군은단독비행이 금지되었고, 유엔공군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닦아 둔 활주로에서도 쫓겨났다. 사천비행장의 부족한 활주로로 인한이착륙의 어려움은 감수하더라도, 한때마산일대까지 북한군이 공격해오면서 위태롭기도 했었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백구부대 창설로 조종사들이 대량 육성되어 F-51 무스탕 조종사들 숫자가 증가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공군의 단독작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공비 토벌을 통해작전능력 향상과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김신 중령도 1951년 10월까지 공중전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회 출격하며 지리산 공비 토벌 항공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김신은 고참이 되면서 직접비행을 통한 전투 참여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였으나 전투 의지는 매우 강했다.

 

특히 1952년 1월, 김신 대령이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 유엔군이 500회 넘게 출격하면서도실패한평양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을 지휘해 한국공군 단독으로 성공함으로써 우리 공군의 위상을 높힘과 동시에 전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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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5)]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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