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1-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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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공개된 빨간마후라 단체사진[사진=동영상 캡쳐]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 없이 6·25남침전쟁을 맞이한 것은 국군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군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장비, 즉 전투기도 없이 적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이는 한국 육군과 해군이 1948년 8월15일 한국정부 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출범했지만 공군의 창설은 지연됐기 때문이었다.

 

8·15광복때 한국에는 공군이 필요 없다는 인식을 가진 미 군정청과 한국군 내부의 반대로 공군창설은 한국전이 발발하기 약 9개월 전인 1949년 10월1일이 돼서야 공군창설 7인을 포함한 항공인들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초기에 중국공군 상교(육군중장 급) 겸 지휘부 참모장, 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하고 한국 광복군 참모처장이었던 최용덕 장군을 위시한 장덕창, 이영무, 박범집, 김정렬, 이근석, 김영환 등 공군창설 7인은 미국식 훈련을 다시 받고 육군 참위로 시작하라는 등 미 군정의 홀대를 받았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본받자는 최용덕 장군의 설득으로 홀대에도 불구하고 모두 육군 참위로 임관 후 육군 항공대를 창설, 대한민국 공군의 기틀을 닦았다.

 

당시 장덕창은 일본 민항기 베테랑 파일럿으로 9800시간 비행기록 보유, 이영무는 중국공군 항공대 부대장 소교출신, 박범집은 일본군 육사출신 항공인 중에서 가장 선임자였고, 김정렬은 일본군 항공대 중대장(대위), 이근석은 일본 항공대 소년병 배경의 화려한 독파이터 경력 등의 무시못할 배경이었다. 

 

빨간 마후라의 창시자인 김영환의 경우에는 다른 6명과는 달리 통위부 시절부터 군에 들어가 있었기에 공군창설을 위한 소통의 창구로써 포함되었다.

 

이전 육군 항공사령부로부터 독립한 공군의 규모는 병력 1616명과 항공기 20대(L-4/5 각 10대)였다. 독립하여 창설된 공군은 북한 공군력 확대에 자극받아 미국에 수차례에 걸친 공군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좌절됐다. 

 

그러나 국민성금으로 구입한 캐나다산 T-6기 10대만을 추가 도입한 상태에서 공군은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비극적인 전쟁을 맨몸으로 맞게 됐다.

 

반면에 북한 공군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총 226대의 항공기와 병력 약 2800여 명을 보유하고 있어 한국 공군이 전투가 불가능한 극심한 전력 불균형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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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0)] 미 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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