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1-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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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2군수사령관 리처드 위트컴 장군(사진=동영상 캡쳐)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대한민국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대부분 모여 있던 부산에서 1953년 11월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다.


그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개방해 그들에게 천막과 구호물자를 꺼내어 피난민들이 포함된 이재민들을 도왔던 미 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났다. 


위트컴 장군은 1916년 ROTC로 군생활을 시작해 제1·2차 세계대전과 6·25남침전쟁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하던 ‘오마하 해안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1945년에는 일본이 점령 중이던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한 상륙작전에서 17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섬 요충지로 오차 없이 정확하게 수송해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 시절 미 공군이 주둔하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과 미국 본토를 보호한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도 그의 손을 거쳤다. 1941년 위트컴 장군이 기지를 건설할 때는 독일 해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전초기지였다. 


1950~51년에는 영하 60도인 그린란드에 공군기지를 건설하고자 세계 각국의 병력과 장비,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했는데, 당시 투입된 인력과 장비는 파나마 운하 건설 때와 비슷하다 하니 군수전문가로서 그의 면모와 능력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충원하고, 보급 지원을 하는 병참(兵站)은 전쟁 성패와 직결되는 군사전략 수준의 역할이다. 


중국 한(漢)나라 유방이 항우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신’보다 후방 보급을 맡은 ‘소하’의 공을 으뜸으로 친 것도 군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위트컴 장군 역시 유방의 소하처럼 부임지마다 그 소임을 철저히 완수해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다.‘군수분야의 영웅’ 위트컴 장군은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제 2군수사령부는 개전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의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와 정확한 수송, 국군 전력 증강은 그의 몫이었다. 개전 초기 9만6112명이던 한국군 병력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 20개 사단 56만8994명의 대군이 된 것도 한국군 전력 증강에 매진한 위트컴 장군의 공이 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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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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