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에게 화살이 집중될 것을 우려한 마오쩌뚱은 팽더화이를 포함해 약 17000명을 또다시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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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6.29 04:59
‘대약진운동’ 실패에 따른 7천인대회에서 정계 일선 퇴진하여 상왕으로 군림한 마오쩌뚱이 후임자인 류사오치를 ‘해서파관 사건’으로 토사구팽시켜 처형하는 모습. [사진=권성욱]
[시큐리티팩트=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6.25남침전쟁에서 중국군의 위상을 높힌 팽더화이는 현장 확인을 통해 ‘대약진운동’이 이미 실패해서 인민들의 실상이 처참해진 것을 마오쩌뚱에게 보고하며 완화시키도록 건의했다.
이에 본인에게 화살이 집중될 것을 우려한 마오쩌뚱은 팽더화이를 포함해 약 17000명을 또다시 숙청했다. 하지만 마오 자신도 결국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정계 일선 퇴진을 선언했고, ‘대기근은 70%가 인재이고 30%가 천재지변이다’라고 언급했던 소련 유학파 류사오치를 후임자로 추대했다.
그렇지만 군과 당권을 유지하며 상왕으로 군림한 마오쩌뚱이 ‘해서파관 사건’을 구실 삼아 후임자인 류사오치를 토사구팽시켜 또 처형했다. 이때 류사오치는 마지막 처형 순간까지 마오의 진면목을 몰랐다고 전해진다. (다음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