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장 시절 故 한묘숙 여사와 우측 2011년 7월12일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 위트컴 장군 묘역을 참배하는 위트컴 희망재단 관계자(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장군의 미망인 한여사)들 모습. [사진=박주홍]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긴장한 목소리로 “좀 나와 주시오. 오늘 한복을 입지 말고 양장을 하고 와요”라고 한묘숙 여사에게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그녀는 평소 한복을 입었는데, ‘무슨 일일까?’하고 궁금했지만 얼른 양장을 하고 영문도 모른채 장군을 따라갔다. 미국대사관 앞이었다. 그제야 큰 키의 위트컴 장군은 그녀를 굽어보면서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그의 갑작스런 청혼에 한묘숙 여사는 어리둥절했다. 사별을 하고 혼자가 된 70세의 위트컴 장군과 당시 37세였던 한 여사는 33년 나이 차이가 있었고 재혼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했다.
대사관을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부부가 되어 있었다.
한 여사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장군의 애국심과 인간애에 깊은 애정과 존경을 느꼈다.
위트컴 장군은 공과 사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청렴한 신사였다. 그녀는 “장군님은 평소 누군가 군용 종이에 메모라도 하면 ‘정부 자산을 왜 함부로 쓰느냐’고 다그칠 정도로 공사(公私)를 분명히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군님은 미군 장교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상사가 나를 군용차에 태우려 해도 같은 말을 하며 사양했고,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손수건과 속옷을 직접 빨아 빨랫줄에 널었어요”라고 회상했다.
결혼 후 위트컴 장군은 한 여사의 1남 1녀를 끔직이 사랑했다. 그는 한여사의 딸이 미국 유학을 갔을 때, 매일 아침 일어나 가장 먼저 유학을 보낸 그녀의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딸은 곧 그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한 여사는 “그날 결혼식을 올린 겁니다. 생각하면 ‘우스워요’ 전남편과 이혼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나려 했지만 당시 유학 정보가 없어 고민하던 중 익선원을 찾은 위트컴 장군에게 ‘유학 도움’을 요청한 게 부부의 연이 됐다”며 그리워했다. (다음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