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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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날으는 홍범도가“ 1절)



(안보팩트=홍성덕 선임기자)

여천 홍범도는 어떤 분인가? 97년 전 일본정규군과 이뤄진 봉오동 대첩에서 홍범도장군 주도로 승전했을 뿐만 아니라, 청산리 대첩도 김좌진 장군과 함께 대승을 했으나 이 역시 주역은 홍범도장군이었다고 늦게나마 학자들이 밝히고 있다.

여천은 한마디로 부모의 덕도 나라의 덕도 전혀 보지 못했으면서 부인과 두 아들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친 애국자이고 독립운동가이며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의 영웅이다.

여천은 1868년 8월 27일 평양에서 남양홍씨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하여 머슴 노릇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15세 때 평양의 친군서영에서 나팔수로 근무하면서 사격과 전술을 배우게 된다.

23세 때에 강원도 금강산 신계사에서 이순신장군의 후손인 지담대사의 상좌로 일하면서 임진왜란 시 승병 등 애국적 전통과 의병활동을 파악하고 뒷날 아내가 된 단양 이씨를 만난다.

29세~39세 사이 함경도 북청에서 헤어졌던 단양이씨 이옥구를 만나 결혼생활, 사냥과 농업에 종사하며 양순, 용환 두 아들을 두는 등 홍장군 일생에 가장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

39세 때 안산사 포계의 회원들과 함께 일제의 총포화약류 단속법을 거부하고, 북청에서 무장 항일의병부대를 조직한 뒤 북청과 풍산의 경계지대인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섬멸한다.

40세 때 300여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갑산읍을 점령한 이후 ‘백두산 호랑이’, ’날으는 홍범도’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불행하게도 일제의 고문으로 부인 이씨가 순국하고 큰 아들 홍양순은 정평배기 전투에 참전하여 전사했다. 1908년 11월에 40여명의 의병과 함께 중국으로 간 뒤, 12월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게 된다. 41~50세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군자금으로 모집활동과 항일단체 권업회를 조직하여 부회장, 그리고 노동회 회장으로 철도공사를 하면서 노임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했다.

51세 되는 1919년에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노령주둔 대한독립군 대장’명의 유고문을 북간도 일대에 살포 독립전쟁의 명분을 선포하였다.

1920년 52세 때 지금으로부터 95년 전 5월 최진동의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북로 제1군사령부 부장을 맡게 된다. 그해 6월7일 북간도 독립군 연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장으로 700여명의 독립군을 지휘 일본군 월강(越江)추격대대를 매복했다가 섬멸한다. 이때 일본군 120여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 전투가 일본 정규군과 첫 번째로 싸워 대승한 ‘봉오동대첩’인 것이다. 그 해 10월 21~28일까지 백야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청산리 전투를 주도하여 일본군 600여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를 청산리대첩이라 한다.

53세 때 4월 대종교 지도자 배포 서일 및 만주 전 독립군 연해주 일대 독립군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대한독립군’으로 개편하고 부총재에 취임한다.

54세 때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주최의 극동제민족(諸民族)대회에 한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 소련 공산당 지도자 레닌을 만나고 모젤 권총과 금화 100루불을 수령하였다.

1926년(58세) 40세 때 첫 부인이 순국한 이래 18년 만에 러시아에서 이인복여사와 재혼한다.

69세 때 스탈린 강제이주정책으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그 곳 크즐오르다 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일기를 쓰며 연극 등을 통한 민족정신을 고양한다.

1943년 75세 때 2년 후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서거하셨다. 카자흐스탄에는 유해를 모신 홍범도장군 공원과 흉상을 세워 홍범도장군을 기리고 있다. 늦게나마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서거 62년 만에 ‘(사)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초대 이사장에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선임했다.

광복 후 첫 추모행사를 거행한 이래 매년 봉오동 전승기념식과 추모식과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독립운동정신과 애국애족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여천은 대한독립군의 양대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전략전술가이다. 장군이면서 계급을 달지 않고 사병들과 같은 복장을 입고 함께 먹고 자는 자애로운 장군인 반면 군율을 어길 경우에는 가차 없이 총살하는 엄한 장군이기도 했다.

해방72주년을 맞았으나 아직도 한반도의 온전한 해방이나 독립이 아니라 반쪽의 해방과 반쪽의 독립인 것이다. 여천이 꿈꾸든 대한독립운동은 107년 전 한일합방 이전으로 국권과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할 우리의 과제이며 사명인 것이다.


“왜적 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 부산 넘어 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날으는 홍범도가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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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무장항일 독립운동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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