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2-0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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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과 격렬한 ‘장진호 전투’로 지친 미7사단 31연대전투단 병사들이 눈 덮힌 장진호가 보이는 참호에서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좌측)과 128km의 죽음과 공포가 뒤섞인 포위망 돌파 혈투를 마치고 흥남항에 도착하는 미 해병대 1사단 장병들(우측). [사진=생명의 항해]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에 남아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라 불린 위트컴 장군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2년 심장마비로 타계하기 전까지 은밀하게 북녘에 있는 미군 유해 송환 사업에 나섰다.  


그는 6·25남침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걸 생애 마지막 임무로 여겼고 그의 평생 숙원이었던 사실을 아내 한묘숙 여사에게 밝혔다. 


장진호는 1950년 영하 40도의 겨울 혹한에 미 해병대 1사단 1만여 명과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원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남하는 2주간 지연됐고, 피란민 등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철수’를 할 수 있었다. 생전에 위트컴 장군은 아내에게 “장진호에 수천 구의 미군 유해가 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북한을 다녀왔던 한 여사는 생전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에게서 당시 미군 병사들이 죽을 때 ‘마미(Mommy)!’하고 외치더라는 증언을 들었어요. 북쪽 사람이 저에게 ‘마미’가 뭐냐고 물어 ‘엄마’라는 뜻이라고 대답해줬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사람이 '미국 놈들이 오마니를 찾다가 죽어갔구나'라고 말할 때, 장군의 유언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이역만리에서 엄마를 찾으며 죽어간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어요“라고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당시 위트컴은 공인의 자격으로 자신이 적성국인 중국이나 북한에 들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미국 시민권자가 된 한묘숙 여사를 통해 유해 발굴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하려 했다. 


한 여사는 남편의 소개서 한 장만 지닌 채 방법을 수소문하며 관계자들을 접촉하기 위해 100여 차례 홍콩을 방문했다. 그 결과 1979년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고, 북한이 정치적 흥정을 붙이기도 했지만 1990년부터 1995년 사이에 23차례나 북한을 다녀왔다. 


그리고 부창부수(夫唱婦隨)였다. 한 여사는 북한이 문을 닫아버렸던 1995년 이후에도 2017년 임종 직전까지 장군의 유지에 따라 미군 유해 송환에 지속적으로 끝까지 헌신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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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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