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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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컴 장군은 재직 시에도 틈을 내 어린이 보육시설을 방문했고 전역 후에는 한미재단과 서울의 희망보육원(1958년)을 설립하는 등 전쟁 고아들을 지원하면서‘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었다. [사진=박주홍/신동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이 1982년 7월12일 서울 용산의 병원에서 영면했을 때 동아일보는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 위트컴 장군 영면하다’라는 부음 기사를 썼다. 


故 위트컴 장군은 전역 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한국의 재건과 전쟁고아의 성장뿐 아니라 중국과 아시아지역 의료시설 확충과 북한 땅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미군 장진호 전투 전사자의 유해를 찾아오는 일을 여생의 임무라고 믿고 실천했다. 


이를 위해 1960년대에는 고령에도 서울을 근거지로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을 돌며 이곳의 낙후된 의료시설을 보고 ‘위트컴 희망재단’을 설립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 한국인임을 자처하고 한국 여성인 한묘숙 여사와 결혼했다. 한 여사는 이후 위트컴 장군의 유지에 따라 북한을 25차례나 방문해 미군 장진호 전투 전사자의 유해를 찾았다.  


그는 죽어서도 미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묻히기를 원해 별세한 뒤 현재 부산시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 안치됐다. 장군급으로서는 유일하다. 


한편 부산대 김재호 교수는 故 위트컴 장군의 미망인이 서울 용산에 계신 것을 알고 한묘숙 여사를 찾았고, 추모사업회를 만들어 매년 7월12일 유엔기념공원에서 추모식을 열어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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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9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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