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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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9월,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총리회담을 성사시킨 강영훈 전 총리가 김일성과 북한 연형묵총리와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장군은 1921년 평북 창성군에서 태어나 청산보통학교 졸업후 영변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다카다(高田)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했으나 1944년 1월 봉천의 보병학교와 1945년 초랴오양의 예비사관학교에 다시 입교하여 그해 7월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다가 곧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된 후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한 그는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6.25남침전쟁때에 국방부 관리국 국장, 3군단 부군단장 임무를 수행한 그는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이후 사단장을 거쳐 1960년 포천에 있는 6군단장 시절 4.19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를 출동시키라”고 명령을 받았으나 강 장군은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였고, 곧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된 후에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참군인이었다.  


이후 군부의 권유를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62년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도 설립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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