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베트남.png▲ 1975년 4월엔 월남이 패망하자 공산치하가 싫어 탈출하려는 보트피플 중 11만 여명이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되었다. [출처:방송화면 캡처]
 

[안보팩트 = 강철군 안보전문기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경, 겨우 10만 명의 정규군밖에 없던 월맹군이 자신들 보다 수적으로 월등하게 많은 100만 대군과 세계 4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월남군을 무력하게 와해시킨 후 사이공에 있는 대통령궁을 점령하면서 월남공화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은 2000년 6월 김대중, 김정일의 1차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등으로 곧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때와 똑같이 흥분된 분위기를 국내 뿐만아니라 세계적으로 만연시켰다.
 
그러나 2013년 4월 3일 북한의 김정은은 개성공단을 차단하며 협박해 우리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면서 새로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를 시험했고, 2010년 4월 29일에는 천안함 폭침 순직자 46명에 대한 영결식으로 현충원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1975년 4월엔 월남이 패망하자 공산치하가 싫어 탈출하려는 약 106만 명으로 추정되는 '보트피플' 중 11만 여명이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되는 참혹한 비극도 일어났다. 


베트남 5년 억류, 이대용 주월남 공사  

월남 패망 당시의 휘몰아치는 격동의 역사현장에서 온 몸으로 처참함을 목격하며 공산당으로 전향을 거부하며 5년 동안 인간이하의 잔혹한 대접을 받으면서도 형무소 생활을 하며 인내하는 굳은 의지를 불태웠던 진정한 군인 이대용(예비역 장군) 주월 한국대사관 정무담당 공사가 있었다. 
  
제목 없음.png▲ 이대용 장군 (前 자유수호 국민운동 상임의장)은 1963년 주월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파월해 3년을 근무했고, 1968년엔 장군으로 진급해 주월 한국대사관 정무담당 공사직을 수행했다. [출처=방송화면 캡처]
 
이대용 장군(前 자유수호 국민운동 상임의장)은 1963년 주월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파월해 3년을 근무했고, 1968년엔 장군으로 진급해 주월 한국대사관 정무담당 공사직을 수행했다. 또한 한국군이 철수한 후인 1973년 4월 주월 한국대사관이 경제담당 공사로 임명돼 월남 패망 시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총 3번의 대사관 근무 9년 6개월, 형무소 생활 5년을 베트남에서 보냈다. 
  
월남 패망 2년 전인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과 남북베트남 3국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외국군대가 모두 철수했다. 그 후 월맹군의 총공세가 시작돼 부패한 월남정부와 반공정신을 모르는 월남국민들은 공산 월맹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공격해오는 월맹군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시킨 월남의 전투기들은 기수를 돌려 월남 티우 대통령이 머물고 있는 대통령궁을 폭격하고(훗날 월맹군에게 영웅 대접 받음), 정부·군대·대학 등 어디든지 월맹의 스파이들이 득실됐다. 각종 민간단체로 위장한 공산분자들이 나라의 여론을 분열시키고 지식있는 학자들과 종교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은 연일 반정부 데모로 날을 지새우며 서로 큰 목소리를 내던 그 나라는 목소리를 높이던 그들의 소원대로 나라는 쫄딱 망하고 말았다.  

당시 한국인 철수 본부장이었던 이대용 공사는 베트남에 남아있는 동포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야하고, 또 그것을 교섭해야 하는 임무와 책임감 때문에 철수하는 헬기가 저만치 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대용 공사는 곧 월맹군에게 체포돼 치화형무소 사형수방에 2년 1개월 갇혀있는 것을 포함해 5년 동안 끔찍한 수감생활을 했다. 사형수방은 면회도 안 되고 햇볕도 298일만 볼 수 있었으며, 식사도 하루에 두끼밖에 배식하지 않아 원래 78kg이던 몸무게가 40kg까지 빠졌으며, 오랜 수감생활을 하다보니 피하조직의 파괴현상으로 온 몸에 구더기가 생기는 등 참혹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그 와중에 월남에서 반정부 데모를 주동했던 많은 지식인·종교인들을 포함한 반정부인사들이 형무소에 수감됐다. 나중에 확인된 것이지만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반정부 투쟁을 벌이며 파월 한국군과 미군들이 싸웠던 게릴라(베트공 전사)들 조차도 모두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이때 처형된 월남 사람들의 규모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처형된 진짜 이유는 간단하다. 월남에서 반정부 활동을 벌인 세력들은 통일 베트남에서도 똑 같이 반정부활동을 벌일 것이라는 논리였다. 마치 6.25남침 전쟁 전에 남로당 당수를 하며 공산당의 총수임을 자처했던 박헌영이 6.25이후 월북해 열렬한 환영을 받다가 처형된 것과 같은 형태라 할 수 있겠다.
  
내부의 적은 반드시 색출해야

이 공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노력, 영국계 유태인 아이젠버그의 적극적인 중재로 5년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석방돼 1980년 4월 김포공항으로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 공사는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리에서 계엄해제 독제타도를 외치며 데모하는 시위군중들을 보며 월남처럼 될까봐 노심초사 했었는데, 아직도 북한 노동당규약에 있는 적화통일하겠다는 내용을 진보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따라하려 한다면서 또 그런 사람들이 진보 정치인인 체 가장하고 있다며 더욱 애통해했다.  

진정 그렇다. 월남은 내부의 적을 방치했기 때문에 안에서 곪아 무너졌다. 우리도 내부의 적은 반드시 색출해 제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헌법을 부정하면 안 된다. 물론 좌익은 미국이나 영국에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도 헌법을 지키면서 국가의 존재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활동한다.   

2015년 주미 대사 리퍼트에게 테러를 가하는 우리마당 대표의 무모함도 있었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월남 패망의 교훈을 상기해 이번 기회에 제도권 내에 들어와 마음을 바꾸고 합법적으로 행동해 선진 법치국가의 위상을 제고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또한  4월의 마지막 날,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회담으로 평화 무드가 조성된 가운데에서 잊혀지기 쉬운 교훈인 월남 패망의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한 이대용 장군의 견위수명(見危授命)하는 군인정신(軍人精神)에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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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군의 아우성] 4월 30일, 월남 패망의 교훈을 상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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