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의병 까치.png▲ 호국보훈의 달을 하루 앞둔 31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까치가 호국영령의 묘비 위에 앉아 있다. ⓒ뉴시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며, 1일은 “호국의병의 날”이다. 

스스로 나라를 지킨 민중인 '의병'의 의미를 되새겨볼 때

[안보팩트 = 강철군 안보전문기자]

이익을 볼 때는 정의를 생각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볼 때는 목숨을 바쳐라.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유교 경전인 논어(論語)에 25회 나오는 명언이며,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기준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매년 6월6일 현충일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당대표들이 각각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추모행사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6월13일 지자체장 선거를 앞두고 야심을 갖고 있는 많은 선량들이 현충원에서 장사진을 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심없이 진정한 애국을 하는 분들에 의한 진심어린 현충일 추모행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고려·조선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의 군대들은 몽고군과 왜군에게 패퇴하여 쫓겨 갔지만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의 항전이 애국·애족정신을 바탕으로 국가보존과 통합,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1982년 10월 19일 안효상 의병기념사업회장과 박순천씨 등은 4월22일을 “의병의 날”로 정해달라고 국회 등에 청원했다. 이들은 독립기념관 건립추진과 때맞춰 외세항쟁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홍의장군 곽재우가 경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의병의 효시가 됐던 4월22일을 “의병의 날”로 정하자고 건의했다. 

그 후 2008년8월 의령군수 등 1만 5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다시 청원하였고, 201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었다. 곽재우 홍의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4월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1일로 선정했다.  

2010년 5월25일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일부 개정령”이 대한민국 관보에 게재·공포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의병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이전에는 개인이 지배하는 사병이 존재하였고 때로는 사병이 나라의 명을 받아 활동하기도 하는 등 정규군과 비정규군의 경계가 모호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 삼별초는 고려가 항복하기 이전에는 최우의 사병집단이었으며, 대 몽고항전에서 유명한 김윤후가 몽고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할 때 그의 신분은 승려였고 그가 이끈 군대는 노비가 주축인 민병이었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과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각지의 민병들을 의병이라 불린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그 때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의병의 신분 구성이 다양하듯이 사상적 기반도 다양하였지만, 유교의 충의정신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유교를 발전시킨 것이 국방을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그 대신 국민들의 충성심을 배양하여 그 저력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또한, 한국은 예로부터 향촌 공동체가 향토방위를 떠맡아 온 오랜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의병 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충돌 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 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의병은 각처에서 일어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중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두고 명성을 떨친 사람은 평안도의 조호익(曺好益)·양덕록(楊德祿)·서산대사,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경기도의 김천일(金天鎰)·심대(沈岱)·홍계남(洪季男),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고령의 김면(金沔),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영천의 권응수(權應銖), 충청도의 조헌(趙憲),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 황해도의 이정암(李廷馣), 강원도의 사명당 등이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 등을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지형지물을 이용한 작전 등 관군의 전투 능력을 강화시켜 의병들은 한층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병자호란 시에도 각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청나라군의 주 침공루트를 중심으로 크게 저항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저항했던 의병들은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서울 공격을 시도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국권회복에 성공하지 못한 채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거나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상당수는 독립군과 광복군에 참여하여 이후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은 1895년의 을미의병과 1905년 이후의 을사·정미의병이 대표적이다. 1895년 의병은 흔히 을미의병이라 하며 지방의 명망있는 유생을 중심으로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다. 초기 의병은 양반 중심의 활동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들 중에는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쇄국정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이항로의 문하생이 많았으며 위정척사의 명분에 의해 봉기하였다.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일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퇴조하자 을미 의병은 대부분 해산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이 가장 큰 과제로 떠올랐고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이를 을사의병이라 한다. 이 시기 의병 역시 초기에는 최익현 등 지방의 존경받는 유생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투쟁 대열에서 곧 탈락되었다. 최익현은 관군이 진압하자 국왕에게 칼을 겨눌 수 없다는 봉건 윤리에 의해 스스로 투항하였다. 대신 무명이었던 유생과 농민이 의병의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  

1907년 군대의 해산 이후 상당수의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당시 의병장은 안계홍과 같은 몰락 양반이거나 한봉수(한민구 前국방장관의 조부), 신돌석과 같은 평민이었다. 이들의 요구 역시 을미의병의 위정척사라는 명분보다는 공평한 토지의 분배와 같은 봉건 수탈의 해체를 주장했다. 

그해 일어난 의병을 ‘정미의병’이라 한다. 특히 1907년과 1910년 사이의 의병 투쟁은 매우 격렬하여서 일본측의 공식통계로 볼 때에도 15만여명의 봉기, 2851회의 충돌에 1만 6700명 사망, 부상 3만 6770명으로 총 5만 3000여명의 의병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한국통사’를 지은 박은식은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요, 국성이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했던 만큼 의병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의병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이 스스로 의사에 따라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구국 민병을 뜻한다. 

스스로의 의사에 따른 민중이라 하면 군사적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백성과 선비들을 말한다.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한 선현들은 오로지 의지 하나로만 외적을 막고,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문구 중 눈에 확 띄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 골프와 바둑이 성공하는 것은 정부에 골프와 바둑을 담당하는 부서가 없기 때문이다 ?”  무능한 정부행정을 비유한 말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임진왜란, 일제침략의 역사 속에서 당파싸움과 개인이익을 위해 나라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조정관료들이었고 이 나라를 구해낸 것은 앞서 설명한 것 같이 의병이었다. 

오늘날도 바둑기사와 골프. 축구선수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신, 정치인들과 정부관료는 언덕 위에 떠도는 허황된 구름만 쫒으며 민생과 국민들은 내팽겨지고 있다. 

의병의 날을 맞이하여 남북미 정상회담과 지차제장 선거를 앞둔 현시점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인가과와 어떤 결정을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일제 강점기 유명한 의병활동가 중에 한분이며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장군의 가르침인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을 관군민(官軍民), 우리 국민들은 마음속에 되새기며 다시 한번 다짐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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