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는 군사외교관으로 활동했던 한국군 장교들이 해외에서 근무하며 겪은 생생한 체험담과 뒷 이야기를 소개하는 [해외무관 프리즘] 코너를 신설한다.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가 이들을 통해 전격 공개될 예정이다. <편집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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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큐리티팩트=임방순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북한무관과 첫 대면에서 엉뚱한 체제 선전에 일격을 당하는 경험도
나는 2002년 10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약 2년간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으로 근무했다. 한국 무관부는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군사외교 활동에 주력했지만, 북-중 관계나 북한에 대한 동향 파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무관은 해당 주재국과 군사외교 관계를 증진하고 필요한 군사첩보를 수집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다. 무관으로 활동하면서 겪은 에피소드 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북한무관과 벌였던 심리전과 첩보전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중국에 주재하는 북한무관과 경쟁 관계는 아니다. 그렇지만 간접적으로 북한무관과 여러 차례 대결 아닌 대결이 벌어졌다.
중국에 부임한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베이징 주재 무관단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처음 참석하는 자리여서 모든 것이 매우 어색했다. 이 때 옆에서 갑자기 “임 무관, 반갑습네다”라는 한국말이 들렸다. 얼른 몸을 돌려 쳐다보니 북한무관이었다.
그는 이어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무관입네다. 임 무관의 베이징 부임을 환영합니다.”라며 다가와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당시 북한무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요란하고 촌스러운 장식이 달린 북한군 정복을 입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만나면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할 대상이 내 앞에서 말을 걸고 있어 한편으론 긴장이 되면서도 일단 인사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는 또 “임 무관, 베이징에 와서 제일 어려운 사정이 뭐이요?”라고 물었다. 잠시 내 답변을 기다리다가 그는 “임 무관, 아이들 교육 아니겠소?, 그렇지요?”라고 말했고, 나도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그렇지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빛나더니만 큰 소리로 확신에 차서 말했다. “우리 공화국은 무상교육이라 그런 걱정 없습네다. 공화국에서 알아서 다 잘해줍네다. 이게 바로 남조선하고 차이점입네다. 안그렇소?”라고 말하고는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렸다.
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하고 그냥 일방적으로 북한무관의 체제 선전을 들었다는 생각에 자책감도 들었다. 이미 철지난 60∼70년대의 ‘이밥에 쇠고기국‘ 선전을 듣고 있었으니 말이다.
태영호 前 영국주재 북한공사가 최근 발간한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책에 북한 외교가 왜 강한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북한은 죽을 각오로 외교를 하고, 어떤 분야이든 장기간 보직되어 자기 업무에 정통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내가 만난 북한무관도 당시 그랬을 것이다. 반면, 나는 북한 외교관들처럼 죽을 각오로 무관업무를 수행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야전 부대에서라면 내 직책과 계급에 상응하는 북한군에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베이징의 군사외교 무대는 처음이어서 아직 업무에 정통하지 않은데다 외교관 경험도 없어 초기에 의외의 일격을 당했고, 그 기억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었다.
북한무관의 체제 선전을 뒤집는 평양의 생생한 첩보를 수집하기도
중국무관의 주요 업무는 주재국인 중국과 관련된 업무지만 북한 동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2003년 당시는 제2차 북한 핵 위기가 큰 이슈였다. 따라서 이와 관련된 첩보를 수집하는 것 또한 중요한 업무였다.
나는 북한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평양을 왕래하는 인사들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그 결과, 베이징에 주재하는 유럽국가의 무관들이 평양무관을 겸임하고 있어 업무 차 정기적으로 평양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다가 평양주재 외국무관들도 봉급수령 등 행정업무나 휴가 차 가끔 베이징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베이징은 북한과 연결된 통로였고, 베이징 주재 외국무관과 평양 주재 외국무관이 내가 접촉하여 북한 정보를 입수할 대상이었다. 나는 이들과 접촉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추진했다.
이 때 무관단 모임에서 또 북한무관을 만났다. 그는 히죽이 웃으면서 “임 무관, 남조선에서 흡수통일인가 뭔가 하는 소리를 한다던데 꿈도 꾸지 마시오, 우리는 남조선에서 보듯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소”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줄 알고 준비한 멘트를 날렸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흡수통일하려는 생각은 없지만, 북한주민들이 북한체제가 싫다고 탈출하고 있는데 이게 점차 확산되면 자연스럽게 통일되는 거 아니요? 황장엽 당비서도 북한체제를 버리고 한국으로 망명하지 않았소.”라고 맞받아쳤다.
그러면서 나는 북한 핵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북한은 왜 핵개발을 하려고 하는가? 국제사회가 반대하고 주민들 경제난 해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그는 “핵 개발은 자주권 문제니 남조선이 간섭할 일이 아니오, 그리고 미국 등 강대국은 이미 핵을 개발해 핵보유국이 되었는데 우리는 왜 안되는가?”라고 논리를 전개한다. 이어서 “우리 북조선은 일치단결해서 핵개발을 하고 있고 국제사회의 위협과 간섭에 까딱도 안하고 있소.”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나는 평양 내부를 좀 더 들여다보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우선 평양에 상주하지는 않지만 북한무관을 겸임하는 유럽국가 무관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아 나갔다. 그들에게 북한 출장을 다녀오면 북한 상황을 좀 전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북한에 다녀오면 나에게 북한의 모습을 하나 둘 전해주었다.
그들을 상대했던 북한 인민무력부 담당자의 발언이나 핵 개발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 그리고 평양의 분위기 등을 알려주었고, 어떤 무관은 심지어 자신의 보고서를 전부 나한데 건네주기도 했다. 이들로부터 파악한 첩보는 핵심적인 사항은 아니더라도 당시 평양의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으로 평양에 주재하면서 업무 차 베이징에 가끔씩 나오는 외국무관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하지만 이들을 직접 만나는 것은 서로에게 위험 부담이 컸다. 만약에 어디선가 문제가 발생하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 소지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 관계가 좋은 동남아 국가(보안상 A국으로 명기) 무관에게 조심스럽게 제의를 하였다.
정보의 세계는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주는 것이다. 그도 언제가 내 정보가 필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평양에 주재하는 자기 동료가 오면 일단 말해보겠다고 했다. 얼마가 지난 후, 그는 평양주재 동료가 베이징으로 왔고 내 제안에 동의했다고 하며 날짜와 장소를 알려왔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를 통해 당시의 평양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가치 있는 것도 있었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도 있었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나는 그들이 느꼈던 위험 부담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선물로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
나는 다음에 북한 무관을 만나면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뭐라고? 북한이 일치단결해 있고 전혀 동요가 없어? 나는 지금 평양이 어떤지를 다 알고 있어”라고. 이 게임에서 심판은 없다. 그러나 나는 북한무관이 호언장담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항을 파악했고, 내 스스로 이겼다고 판정했다.
군사외교 관계를 흩트리지 않고 북한무관의 첩보 수집 의도 좌절시켜
내가 중국에서 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한-중 군사관계는 좋았다. 중국 국방부도 우리가 제의한 내용은 거의 다 수용했다. 함께 있었던 미국이나 일본무관은 ‘한-중 군사관계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물어 올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이 군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군사외교 관계를 흩트리지 않고 북한무관의 첩보 수집 의도 좌절시켜
내가 중국에서 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한-중 군사관계는 좋았다. 중국 국방부도 우리가 제의한 내용은 거의 다 수용했다. 함께 있었던 미국이나 일본무관은 ‘한-중 군사관계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물어 올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이 군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당시 우리 정보본부장과 중국 총참모부 정보부장이 대표로 주관하는 ‘한-중 정보교류회의’가 있었다. 양측 정보 책임자가 만나 정보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인데, 북한이 이런 회의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어느 날 A국 무관이 자기 사무실로 와 달라고 했다. 수시로 오고가던 사이여서 차 한잔하러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그도 편안하게 대하면서 말미에 이런 제안을 했다. 자기들도 한국과 같이 중국 총참모부와 정보교류회의를 하고 싶은데 참고자료가 필요하니 회의 형식과 오고간 내용 등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북한무관의 부탁을 받은 것이란 사실을 알아챘다. 자기 나라가 중국과 정보교류 회의를 신설하려면 중국과 협의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 보는가? 나는 A국 무관이 북한무관과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거절해야 기분 나쁘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 친구가 지난번에 내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그렇지만 국가 이익상 말해줄 수 없는 내용들이어서 나는 시간을 끌며 좋은 이야기만 했다. “좋은 생각이요. 당신네 나라는 중국과 관계가 좋으니 반드시 필요한 회의일 것”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A국은 중국과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당시에 중국 주변국 중에서 중국과 신뢰가 돈독한 국가는 역설적으로 한국이었다. 나는 이어서 “작년에는 한국에서 정보교류회의를 해서 잘 모르겠고 금년에는 내가 지방 출장 중이라 참석을 못해 내용을 모르니 본국에 건의해 구체적인 사항을 알려주겠다”라고 얼버무렸다.
A국 무관도 내가 모르겠다고 하니 별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 자리는 마무리 되었지만, 그 후 A국 무관은 나를 볼 때마다 결과를 재촉했다. 몇 차례 재촉 끝에 나는 “본국에서 회신이 왔는데 그 문제는 A국 국방부에서 우리 국방부로 공식적으로 문의하라더라“고 답변했다. 그는 알겠다고 하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A국 무관이 귀국할 때 개인적으로 환송행사를 성대하게 치러주었다. 그도 귀국하면 계속 연락하자고 했지만 그 후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북한무관, 중국에 대한 불신과 미국에 대한 부러움 솔직히 털어놔...김일성, "중국인 뱃속에 주머니 몇 개 인줄 몰라" 발언 확인
몇 차례 만나다 보니 북한무관과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처음 볼 때 느꼈던 긴장감은 줄어들었지만 이 친구 이야기에 무슨 복선이 있는가 하는 의심은 거두지 않았다. 그도 나를 몇 차례 봐서 그런지 처음에 보였던 오만한 자세는 거두고 제법 진지한 이야기도 건네 왔다. 어떤 때는 무의식적으로 반말도 했다.
그가 이임하기 얼마 전에 나와 가볍게 얘기하면서 갑자기 나를 긴장시켰다. “임 무관, 너는 좋겠다”라고.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미국이 너희들 친한 친구잖아, 안 그래? 우리 친구 소련은 망했어. 그리고 중국도 그렇게 친한 친구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입만 열면 ‘미 제국주의자’,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 ‘남조선을 미제로부터 해방시키자’ 이런 구호와 세계관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북한무관한테 전혀 뜻밖의 말을 들은 것이다. 이 말이 북한무관의 본심일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나는 속으로 “너는 그래도 외국생활을 해서 그런지 제대로 알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래 맞아. 우리는 좋은 친구를 두었어”라고 대꾸했다. 그러면서 “북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같은 민족이잖아. 현실을 잘 분석해서 정책 조정이 필요해. 어느 나라든 똑 같아”라고. 나는 북한의 실정을 솔직히 고백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말했다.
그는 긍정도 부정과 하지 않은 채 “임 무관, 내 가면서 한마디 하갔는데, 너 중국 애들 조심하라, 중국 애들은 뱃속에 주머니 몇 개가 있는지 몰라,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어”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북한과 중국은 ‘피로 맺은 전우’, ‘강산이 맞닿아 있어 친척 같은 존재’, ‘선대가 맺어준 전통 우의’ 라고 틈만 나면 말하지 않았던가?” 북한무관의 발언이 개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북한의 일반적인 판단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며 상당히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관임무를 마치고 귀국 후 중국에서 품어왔던 북-중 관계를 연구했다. 북한의 중국에 대한 불신은 뿌리가 깊었고, 김일성이 “중국인의 뱃속에 주머니가 몇 개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발언한 사실도 확인했다.
나는 당시 북한을 담당하는 중국인들을 통해 그들이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북한은 도와주어도 고마운 줄 모른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북한과 중국은 그들이 사용하는 수사와는 달리 내면적으로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못하지만 양국 간 일치되는 전략적 이해 때문에 표면화되지 않고 관계가 유지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대 외래교수 (북한학 박사)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