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비핵화와 종전 선언의 빅딜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3차 방북 당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박진호 전문기자)
6·25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에서 시작됐다.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을 찾아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지도를 받는다. 북한·중국·소련이 연대해 전쟁 여건을 조성하는데, 전쟁지도 경험이 많은 스탈린은 제일 먼저 명분을 확보한 후, 군사적 능력을 구비하되, 한반도 내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침 전 김일성은 3차례에 걸쳐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당시 스탈린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하면 반격을 통해 통일을 달성하라”고 강조했지만, 김일성은 제한적 공격을 감행해 성공하면 공격을 확대해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성급했던 김일성은 스탈린이 조언한 ‘명분 확보’의 중요성을 잊고 남침함으로써 미군 등 유엔군의 개입을 초래해 결국 실패하고 만다.
1950년 3월 스탈린과 김일성 회담에 관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작성한 회담요약 기록에 의하면 김일성의 전쟁 준비는 3단계로 이루어진다. 1단계로 38도선 일대에 전투력을 집중 배치하고, 2단계로 북한이 남한에 평화통일을 지속적으로 제안하며, 3단계로 남한이 평화통일 제안을 거부할 경우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수순이다. 즉 전쟁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평화통일 제안을 이용했던 것이다.
금년 들어 남북 및 미·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면서 평화무드가 조성됐다. 최근 북한은 비핵화와는 별개로 종전 선언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7월 7일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 직후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미국이 조선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이미 합의된 종전선언까지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며 멀리 뒤로 미루려는 입장을 취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북한의 이러한 반응은 6·25 전쟁 준비 단계와 유사하다. 종전 선언은 구속력이 없지만 냉전체제를 해체하고 평화 협정으로 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완료한 상태에서 종전 선언을 요구하고, 이를 한국과 미국이 수용하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는 상황이다.
6·25 전쟁 직전처럼 평화적 제의를 거부한다면서 전쟁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빌미로 삼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종전 선언 요구를 받아들이면 북한 비핵화를 위한 버팀목이 제거되어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
이와 관련,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는 지난 17일 미국의 소리(VOA)와 인터뷰에서 "핵 시설 목록 제출과 종전선언을 맞바꾼다면 분명 문제가 있을 것"이라며 "미국이 섣부른 종전 선언으로 북한이 미군 철수를 주장할 구실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산정책연구원 이기범 교수 또한 "유엔군사령부는 6·25 전쟁 때문에 만들어진 조직이어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어도 북한이 종전 선언을 근거로 해체를 요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종전 선언을 하게 되면, 북한이 유엔사 해체를 요구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이외에도 미국이 북한 핵 폐기를 위한 강압전략 구사를 위해 동북아 지역에 항공모함 전개나 연합훈련 재개 등을 시도할 경우 북한과 중국에게 도발 명분을 제공할 수도 있어 군사적으로 북한을 통제할 수단이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종전 선언을 받아들일 경우 한국이 북한의 핵 개발을 용인하고 항복하는 것처럼 국제사회에 비춰 질 수 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유사시 한국을 지키려고 나서지 않을 소지가 있다.
더욱이 북한 핵·미사일은 전쟁 징후를 노출시키지 않고 언제든지 사격이 가능하다. 설사 미국과 유엔이 지원을 하더라도 6·25 전쟁 당시처럼 개입 명분을 정립해 나서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말 막강한 군사력과 점령지를 확보한 일본에게 핵무기 단 2발로 1주일 내에 항복을 받아냈다. 핵을 보유한 북한을 한국이 독자적으로 대적하려면 핵무기를 보유하고 국민 전체가 결사항전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없는 한국이 비핵화가 되지 않은 북한을 상대로 핵 폐기를 강압하는 미국과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유사시 응징의 명분을 제공하는 유엔의 힘을 빼서는 안 된다.
결국 북한과의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고받을 것의 순서를 지키는 것이다. 이 순서가 잘못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가장 결정적인 카드가 넘어올 때까지는 상대방이 원하는 카드를 주어선 안 된다. 먼저 내어줘선 안 될 카드를 주고 나면, 상대방은 더 이상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수개월 간 김정은은 경제 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평양 외곽 산음동 무기공장에서 신형 ICBM을 개발하는 정황이 포착되는 등 핵 보유에 대한 의지도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종전 선언이 유사시 군사적 대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카드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북한 비핵화가 진전된다는 확신이 있을 때 종전 선언이 추진되도록 단호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이화여대 안보학 교수 (공학박사)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연구위원
방위사업청 자문위원